변두리생각

하산 길

변두리1 2019. 10. 30. 20:38

하산 길

 

  문장대에 올랐다. ‘글이 감춰진 높은 곳’, 무슨 글이 감춰져 있을까. 타고 오르는 마지막 쇠사다리 계단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머리칼을 흔들어 제키는 강풍에 탁 트인 사방을 바라보기 쉽지 않다. 속리산 등반은 문장대를 오르는 게 절정이며, 반일 수밖에 없다. 반환점인 셈이다. 등산 경험이 없는 온 가족이 함께 오르려니 짧은 경로의 쉬운 길을 택했다. 성취감을 누리며 정상에서 내려와 잠시 휴식 후 시간을 보니 세 시 조금 넘었다.

  햇살이 가득하다. 조금 더 머물다 가고 싶지만 아쉬움을 안고 가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고 뻐근한 다리로 내려간다. 문장대에서 화북 주차장까지 3.3km , 평지라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길이요 차로 간다면 5분이면 넉넉할 게다. 문제는 오를 때에도 여러 번 쉬었을 만큼 허약한 체력이다.

  쉬며 보아도 신기하다. 산꼭대기에 거대한 바위덩이가 올라앉아 있다니, 정상은 모두가 바위덩어리다. 계곡에 자리한 어떤 바위는 커다란 틈이 생겼고 금이 가고 있다. 쪼개지는 과정을 겪는 중이다. 자세히 보니 갈라진 곳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다. 못할 노릇이다. 비와 바람에 날아와 쌓였을 한줌 흙에 씨앗이 떨어지고 끈질긴 생명력은 바위틈 열악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을 게다. 아주 조금씩 뿌리가 자라고 계절이 여러 번 지나 얼며 녹기를 거듭하면서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으리라. 시작이 어렵지, 강인한 생명력을 뉘라서 막으랴. 고요한 숲 속에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곳으로 눈을 옮기니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나무를 쪼고 있다. 딱따구린가 보다. 보는 내가 머리가 아프다. 거센 나무줄기를 수시로 그 작은 부리로 쪼고 있으니 머리는 온전할까, 부리는 망가지지 않으려나. 그렇게 살아가도록 태어났겠지만 안쓰럽다.

  다리가 풀려 내려오는 길이 만만치 않다. 다 한 번씩 넘어져도 나는 괜찮으려니 했더니 미끄러운 흙을 잘못 디뎌 주르르 미끄러진다. 가족들 눈치 채지 못하게 빠르게 수습하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더 늦게 하산하는 이들이 우리를 추월해 간다. 1km는 내려왔다고 생각하고 이정표를 대하지만 0.2km 하산했다는 현실에 야속할 뿐이다.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여, 숲은 어둑해지고 날씨는 쌀쌀해간다. 두고 온 높은 산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고 가을 산이 고적하다. 어느덧 다들 내려갔는지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한 고비만 넘고 산길이 끝나고 넓은 길이 나오길 바라지만 이정표는 내 기대를 무너뜨린다. 산속의 백 미터는 왜 이리 먼 것인가.

  가족이 함께 하는데도 돌길로 이어지는 하산 길은 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런 내 상태를 이야기하면 서로 힘든 게 배가될 것만 같다. 산속의 고요가 긴장감을 더한다. 오래 전 청년 때에 백리가 조금 넘는 길을 몇 번인가 타박타박 걸어본 일이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날 때는 1km가 별 것 아니더니 걸어보니 멀다는 걸 절감했는데 오늘은 산 속 백 미터가 결코 짧지 않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햇살이 사라지고 빠르게 어둠이 밀려온다. 한 고비를 넘어 넓은 길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건만 다시 나무가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이 땅을 살아가는 게 이러할까. 내 바람과는 무관하게 어려움이 잇따르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힘겨운 일들이 덮쳐오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야 희미한 출구가 보이는 것인가. 도로를 보고 다 왔다고 먼저 소리쳐 격려하고 싶어 조금 앞서 걸었다. 마침내 앞쪽에 등이 하나 보인다. 평지에 도달했다는 징표리라. 곧 넓은 길이 보이고 시멘트 다리가 나타난다. 긴장이 풀리고 편안함이 밀려온다. 시간이 걸릴 뿐, 평지가 나올 게 분명한데도 꽤 긴장을 했나보다. 채 여섯 시가 못 되었는데 사위가 캄캄하다.

  마음이 놓여선지 걸음이 가볍다. 우리 뒤로도 몇 사람이 더 내려오고 있었다. 이삼십 분만 더 늦었어도 정말 무서울 뻔 했다고 모두가 한 마디씩 한다. 집으로 오는 길도 하산 길 못지않게 긴장해야 했다. 해 진 뒤의 시골풍경은 흑암이었다. 가로등이 없는 도로는 한적하고 어두웠고 잘 알지 못하는 길을 안내하는 음성을 따라 돌아오는 건 편하지 않았다. 길가에 들어오는 빨간 신호등이 반갑다. 도로 위 환한 가로등에 마음이 편안해 진다.

  아무런 부담 없이 가족끼리 편하게 가다가 힘들면 어디서든 돌아서 오자던 등반이, 언제부턴가 쉬면서도 꾸역꾸역 올라가 정상을 오른 것까지는 좋기만 했었다. 정상부근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출발할 때도 그렇게 긴장하며 등반을 마칠 줄 몰랐다. 가을 산에서의 날씨를 몰랐고 오랜만에 하는 등반에 과욕이 앞섰나 보다.

언제나 그곳에 자리해 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아무 말 없이 깨달음을 주건만 얼마 못 가 그 절절한 깨달음을 잊고 산다. 삶의 현장 곳곳에서 과욕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해도 그곳만 벗어나면 이내 마음에서 멀어진다.

  내 삶이 하산길이다. 아니라 우겨 될 일이 아니다. 남들은 과욕이라는 걸, 나는 의욕이요 도전적 삶의 자세라고 한다. 산이야 정해진 길 따라 내려오면 조금 늦더라도 평지에 닿아 출발지를 만나지만 삶의 길은 미지의 초행길이다. 문장대에 감춰진 글이 혹시 과욕을 경계하라는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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