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조금 낫게 건너기
더위 속에 책을 읽고 방송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세월을 보낸다. 행복한 삶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가 보다. 일이 잘 풀리는 거야 웬만해서 기억에 남겠나. 힘겨워 잊을 수 없는 일들이 기억에 남는 게지. 생각한 대로 다 된다면야 성공하는 게 뭐가 어려울까. 뜻밖의 일들이 툭툭 튀어나와 예상과 계획을 빗나가게 하니 문제지. 누가 병들고 싶고, 실패하길 원할까. 하루하루 별일 없는 게 참말로 대단한 거지….
사건 사고가 줄을 잇는다. 그중에 많은 게 좋지 않은 거다. 폭력사고 교통사고 금융사고 의료사고 음식물사고 안전사고 여행사고 자연재해까지 수많은 사고들이 우리를 덮치려 생활 속에 숨어있다. 사고를 당하면 그 한 사람으로 파장이 멈추지 않는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영향력은 몇 배로 이어지고 확장된다.
예상 못한 어려움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피해갈 수 없는 고통스런 일들도 적지 않다. 해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수많은 젊은이들, 모두 합격할 수 없으니 정해진 인원 외에는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다. 대학입시보다 더 어려운 취업의 관문. 어쩌면 삶에서 가장 어려운 좌절의 연속일지 모른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자신의 능력과 처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너무도 냉정하게 정체성을 확인한다.
삶이 쉽지 않다. 어린 시절엔 사는 게 어려울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떡하면 못 살아가랴 자신만만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워진다. 어느 순간 사는 일보다 죽는 건 더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죽는 것도 다 돈으로 연결되어 있다.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고 몸을 움직일 때는 의식하지 못하나 병들고 빈곤하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이 들어 자신을 추단하지 못하면 요양병원에라도 가야하는데 그때부터 기한 없는 수동적인 삶과 자녀나 친지들에게 의존하는 생이 시작된다.
갑자기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게 될 텐데, 생명이 끈질기면 긴 세월을 고생하며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리라. 가족 중 누군가 병원에 있으면 적어도 한 사람은 간병을 해야 한다. 사정이 안 되면 간병인을 두어야 하니 병원비에 더해 만만치 않은 지출이 있게 마련이다. 아픈 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경제적 여력이 마땅치 않으면 가족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을까 상상만으로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병을 고치고 더 열심히 살 수 있다하지만 노인들은 그런 희망이 강하지 않다. 건강을 비롯한 많은 면에서 내리막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자살의 이유를 조사하면 질병과 빈곤이 상위를 차지할 게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가족들에게 남겨질 경제적 부담을 고려하면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그 고통을 모두가 당하기보다는 극단적이긴 하나 자신이 해결을 하련다는 막다른 길에서의 선택일 것이다.
누구나 노년의 삶을 피해가기 어렵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면 국가가 나서서 가능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리라. 우리 사회가 재화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인데 좋은 면도 여럿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인간을 수익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돈이 만능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탕만 잘 하면 성공이라는 사고방식을 막기 어렵다. 환금성이 있는 것만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기 쉬우니, 길게 보는 안목이 형성되기 어렵다. 경쟁하듯 자원을 낭비해 과잉생산과 소비의 길로 달려간다.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러 쓰레기는 욕망의 부산물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인간에게 지혜를 주는 건 아닐까.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란 말처럼 이 땅에 들어오고 나감이 모두 빈손이니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욕심을 피할 일이다. 정해진 삶이 끝나면 모두 손 털고 일어날 것을, 언제까지나 자기가 차지하려는 듯 탐욕을 부리는 건 현명하지 않다. 가난한 이들에겐 심각하지만 부호들은 어느 한계를 넘으면 열배를 소유해도 은행잔고에 동그라미 하나 늘어나는 일일뿐이다.
범인들은 왜 돈을 악착같이 모으려할까. 자신을 생각하면 노후가 두렵고 자녀들에 대해서는 교육이 문제다. 선진국 중 다수는 교육과 의료를 나라에서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점차 그런 추세로 가야한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노인의 자살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게다.
죽음은 종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땅의 시각으로 본다면 마지막이요 끝이다. 더 이상의 가변성이 없는 것이니 완성이다. 진행 중인 경기는 역전승이 있지만 죽음은 그 후로 역전이 없으니 최종적 평가가 가능하다. 종교를 생각하면 이 땅의 삶이 판단의 근거가 된다. 영원을 가르는 토대를 쌓는 일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땅의 삶이 점차 길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 있으려나. 종교의 유무를 떠나 이 땅의 삶만이라도 바르고 의미 있게 살 순 없을까. 죽음을 기억하는 게다. 땅의 것은 철저히 땅에만 속하는 것이니 많이 모으고 쌓았더라도 끝이 다가오면, 나누고 하나씩 들어내 주변 사람들과 즐기고 함께 하는 게 인간다운 지혜로운 모습이 아닐까. 고통의 바다라도 함께 건너면 덜 고통스럽고 더 많은 추억거리들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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