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결정적 순간이 온다

변두리1 2019. 7. 1. 21:12

결정적 순간이 온다

 

  얼마 전 일이다. 이웃과의 담장 사이로 한두 사람이 지나가면 빠듯한 공간에 블록 몇 장을 들어내고 심었던 대나무 중에 한두 그루가 갑자기 커버렸다. 사다 심은 지 두어 해 될 텐데 내 키를 넘을까 말까 하더니 비가 오고 며칠 뒤에 보니 일층 지붕에 가지 끝이 닿아 휘어져 있었다. 신기한 일이라 아내와 같이 보며 놀라워했다.

  이층 베란다 아랫부분이 성장에 걸림돌이 될까 대나무 줄기를 밖으로 빼주었더니 또 며칠 사이에 삼사십 센티미터는 더 큰 것 같다. 한동안 자라는 게 눈에 띄지 않더니 무슨 연유로 갑자기 커버린 겐가. 내가 모르는 대나무의 특성이 있는 모양이다. 짧은 기간에 눈에 띄는 성장이나 발전을 보일 때 비약이란 표현을 쓴다. 가끔 이에 어울리는 일들을 본다. 작았던 아이가 이삼 년 지나 만났더니 거인의 청년이 되어있었던 걸 기억한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지지부진 했던 이가 얼마간 안 본 사이에 괄목상대(刮目相對)할 진보를 이루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짧은 기간에 급격히 악화되는 수도 있다. 병세(病勢)를 이야기할 때 주로 듣지만 사업의 성쇠나 경기의 흐름에 대해서도 쓸 수 있을 게다. 잘 생각해 보면 그러한 일들도 적지 않다. 지난날 우리가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아야 했을 때 상황이 그랬을 것이고, 세월호 사고당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숭례문이 밤사이에 홀랑 불에 탈 때에도 그러했다. 통제하기 어려운 속도로 나빠지는 거다. 우리 주변의 환경도 그러하다. 황사의 습격이나 미세 플라스틱이 자아내는 공포도 다르지 않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나라면 뒷짐을 지고 한동안 지켜보고 나서 조치를 취하고 싶다. 막고 지키려 애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게 아니니 차라리 바닥을 칠 때까지 지켜보며 대응방법을 궁구하고 체력 손실이라도 줄이는 게 나을지 모른다. 민주사회에서는 대형 사건이 나면 정치와 행정부 높은 분들의 현장방문과 언론과 방송 취재진들 때문에 적지 않은 힘의 손실이 생기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결정적인 시간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절한 준비를 할 수도 있고 걱정을 줄일 수도 있지 않으려나. 언제일지 정확히 예측하기야 어렵겠지만 대나무는 뿌리에 영양을 잔뜩 비축했다가 단기간에 길이성장을 이루는가 보다. 우리가 하는 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물도 아무 때나 끓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열기를 가해 백도가 되고 한동안 그 상태가 유지될 때, 그 어느 결정적 순간 임계점에서 펄펄 끓어오를 게다. 누군가는 독서를 삼천 권인가 했더니 그때 놀라운 효과가 나타나더라고 했다. 아직 그 결정적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중단할 게 아니라 반드시 그 순간이 올 걸 확신하고 내 편의 노력을 지속하는 게다. 결정적 순간이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늘에 맡길 일이다.

  해마다 봄을 맞으며 느끼는 것인데, 살아있으면 풀과 나무들이 잎이 돋고 꽃이 핀다. 종류에 따라 지형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어도 어김없이 생명의 기운은 찾아오고 푸른 천지를 이루어 낸다. 푸른 잎을 내는가 싶더니 벌써 잎들이 우거지고 짙어져 암녹색이 되었다. 녹색이 번져가는 속도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날마다 감탄했다. 왜 올해만 그러했을까. 매년 큰 차이가 없었겠지만 내 나이가 들어가니 올해가 유난하다고 느꼈을 게다. 해마다 봄을 맞는 감격이 새롭고 자연의 변화가 놀랍다.

  문학과 예술 속에서 만나는 삶과 현실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 일이 많다. 문학과 예술 그것을 극화한 드라마들이 삶의 극적인 순간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게다. 현실의 삶에서 극적인 순간은 많지 않다. 이틀이 멀다하고 극적인 순간들을 겪으면 제 정신 가지고 살기 어려울 게다. 작품 속에서 금기 사항은 지켜지지 않는다. 마치 도로를 닦고 포장을 하고 차선과 이정표까지 완비해놓고도 진입금지라고 하는 것과 같다. 금기는 깨어지고 여러 고통과 처벌이 주어진다.

  현실에서 금기를 범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금기를 지키며 일상의 삶을 살면 답답하고 지루할 걸 모르지 않지만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과감하게 진입하지 못하고 그 언저리까지 같다가 다시 돌아선다. 어쩌면 현실에서 이룰 수 없어 문학과 예술을 통해 일탈과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금기를 깨고 누리는 쾌감 뒤에 감당해야 할 고통과 상실의 두려움으로 사회가 지탱되는 건 아닐까.

  때로 피할 수 없는 교통사고처럼, 또는 자연재해처럼 그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고 싶기도 하다. 이카루스가 새의 깃털로 날개를 달고 미궁을 탈출하다 아버지의 충고를 잊고 태양 가까이 날아올라 바다로 추락하는 그 결정적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황을 받아들이고 바다에 닿는 순간을 철저히 대비했다면 생명을 잃지 않았을까. 신화의 결론은 이미 죽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을 게다.

  대나무가 결정적 순간 훌쩍 자라듯, 그 결정적 순간이 내게도 오고 있다. 뿌리에 양분을 저장하듯, 노력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그 때가 찾아오리라는 걸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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