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향한 귀뚜리의 당부
낮에는 매미가 밤에는 귀뚜리가 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가 보다. 예년보다 조금 빨리 온 귀뚜리 울음소리가 마음을 심란케 한다. 한해살이풀들과 대나무가 있어선지 떼를 지어 운다. 잠을 이루지 못하니 그들의 합창을 듣는다. ‘귀뚤 귀뚤 귀뚤엇’, ‘처리 처리 처리잇…’.늦은 밤 어떤 간곡한 사연을 내게 들려주려는 것인가.
듣는 내게 귀를 뚫으라고 하는 말인가 보다. 처리도 철이(徹耳)가 연음되어 들리는 소리 같다. 귀를 뚫고 들으라는 얘기가 무얼까. 무슨 전할 말이 많아 온 몸을 쥐어짜는 소리로 내 잠을 못 이루게 하는가. 저들과 내 삶을 살피면 내게 주려는 사연을 알아낼 수 있으려나.
밤낮 울어대는 매미나 귀뚜리는 수컷이란다. 지상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사랑을 해 후손을 통한 종족보존을 하는 게 생애 제일의 임무다. 온 힘을 다해 소리 높여 암컷을 불러 대를 이어 간다. 그들의 삶을 볼 때 온 몸으로 외치는 전언은 ‘사랑하라’이지 싶다. 인류에게는 사랑이 꼭 종족보존에 제한되지는 않는다. 이성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동성 간의 우정과 모성애, 부성애 그리고 인류 보편적 사랑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추진력이요 삶의 원천이 사랑이다. 많은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모를 때에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여기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내게 가장 필요한 전언은 무엇인가. 내 창 앞에 찾아와 그토록 소리치는 건 내가 꼭 들어야 할 얘기라는 게 아닌가. 요즘 들어 비슷한 꿈을 자주 꾼다. 꼭 요즘이라 할 수도 없다. 주일 낮 예배시간이 된다. 신자들은 모여드는데 나는 예배에 어울리는 옷을 채 입고 있지 않다. 옷을 찾으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다 술렁거리던 교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뜬다. 어떤 때는 성경을 찾으려 하는데 눈에 띄지 않기도 하고 성경 찬송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곳이 쉽게 찾지 못한다. 나는 시간이 지나며 당황스럽고 성도들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흩어져 간다. 꿈을 깨면 준비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해몽을 한다. 잠 못 이루게 내 귀에 쏟아 붓는 사연이 ‘준비하라’는 것만 같다.
미리 준비하면 당황도 덜하고 사전에 준비한대로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를 해두면 여유가 생기고 차분해진다. 마감시한을 넘기는 것은 최악이요 시한에 쫓겨 허둥지둥 처리하는 건 미련한 것이요 미리 대비하고 점검해서 처리함이 최선이다.
귀뚜리와 나 모두에게 의미 있는 전언은 무엇일까.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가니 ‘시간을 아끼라’는 말이 아닐까. 매미는 십 년 안팎의 기간을 땅속에서 보내고 온전한 매미의 모습으로는 보름 정도를 사는 것 같다. 준비해 온 기간에 비해 수백분의 일 밖에 누리지 못하니 순간순간이 얼마나 아쉬울까. 귀뚜리도 아홉 달 가량 자라나 세 달 안팎을 살다 죽는다. 더욱이 모든 알들이 성충으로 자라는 것도 아니다. 천적과 주변 생물들의 위험을 극복한 극히 일부만 성충이 된다. 인간도 준비하는데 많은 기간이 소모되고 자신의 자리를 찾고 쓰라린 경험을 거쳐 시간이 정말로 소중하다는 걸 느끼는 때쯤에는 남아있는 세월이 그다지 많지 않다.
남은 세월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현명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자신이 해야 할 일들과 우선순위를 가려 관계없는 일들을 하지 않음으로 세월을 아끼고, 우선순위의 앞부분에 있는 일들에 집중하는 게다. 하루에 꼭 해야 할 일 한두 개를 하면 잘 산 날이지 싶다. 과도한 욕심을 버리면 삶이 가벼워진다.
매미와 귀뚜리들이 마음을 잡으라하고 귀를 뚫으라면서 내 귀에 들려준 이야기들이 ‘사랑하라’.‘준비하라’,‘시간을 아끼라’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게 어떤 사연도 들려주기를 원치 않고 본능에 따라 자신들의 짝을 찾으려, 그들의 영역을 알리고 침입자를 몰아내려 그악스레 울어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의 울음에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교훈을 얻는 게 누구에게 피해가 될 수 있으랴. 내 삶의 후반부에 그들의 울음을 들으며 한층 분발해 산다면, 내 자신뿐 아니라 나로 인해 해를 입을 이들이 유익을 얻는다면, 그 아니 좋은 일인가. 해마다 가을의 초입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찾아와 온 힘 다해 울어주는 그들로 내 삶이 풍성해 진다면 마음 열어 크게 반길 일이다.
중요한 전언이 더 남았음인지 내가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음인지 잠시 그쳤던 합창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다 밤을 샐지도 모르겠다.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이제 나는 됐으니 다른 이에게 가서, 그들에게 귀를 뚫으라고 울어대기를 부탁하고 싶다. 잠은 멀리 달아나고 그들의 떼창은 그칠 기미가 없다. ‘사랑해- ’, ‘준비해- ’, ‘시간을 아껴- ’….
‘귀뚤 귀뚤 귀뚤엇’, ‘처리 처리 처리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