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

서러운 퇴장

변두리1 2019. 6. 7. 08:49

서러운 퇴장

 

  우리는 즐거웠다. 적어도 외롭지 않았다. 다섯 가정이 함께 모여 찬양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밤이 늦어 헤어지면서도 아쉬워했다. 서로 무엇을 나눌게 없는지 찾았다. 문밖에 서서 인사말을 건네며 하나 둘 돌아가는 그 때에 몇 대의 차들이 조용히 내가 선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윗부분은 번쩍거리고 있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119 구급차였다.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누가 죽었느냐 물으니 그런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단다. 모두가 사생활보호에 걸리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같다. ‘지난 일요일에도하는 얘기가 들리는 듯도 하다. 집으로 들어오니 옆집 뒷방에 세를 살던 사람인 듯하다.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언젠가 빨래가 널려있었던 것을 보았나 보다. 조용한 소란은 곧 걷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마을과 이웃은 침묵으로 돌아와 있다. 그 때 밖에 있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일이다.

  아버지 돌아가시던 때만 해도 초상이 나면 며칠 밤 그 집에 불이 꺼지지 않았고 시끄러운 소리들이 이어졌다. 조문객이 드문드문이라도 이어지고 밤을 새우려는 이들도 생기고 그때를 고대하고 푼돈이라도 챙기려는 노름꾼들도 자리를 지키곤 했었다. 옆집은 밤새 고요했다. 구급차가 떠나가고 잠깐 머물던 이들이 자리를 떴는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늘 닫혀있던 문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얼굴을 본적 없고 이야기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죽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고 조금은 두렵고 께름칙하기까지 하다. 죽음의 기운이 스멀스멀 돌아다니는 것 같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이 땅에서 퇴장하기 전에 동네에 소문이 돌고, 일을 당하면 온 마을에 알리고 떠들썩하게 작별하던 지난날과 아무런 흔적도 없고 옆집도 모르게 이 땅에서 사라지는 오늘의 차이가 무얼까.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그런 건 아닐까.

  아버지 세대 이전에는 일터와 사는 곳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동네에서 농사짓고 돼지치고 새끼 꼬고 동네일을 의논했다. 아이들은 동네에 있는 같은 학교에 다녔다. 한 우물을 먹었고 여인네들은 빨래터에서 만나고 남정네들은 들판에서 만났다. 일을 마치면 여가를 보내는 것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생활이 조금 나은 집안의 큰일에는 덕을 보는 게고, 어려운 집의 큰일은 도와주어야 할 일이니 모두가 마을의 일이었다. 시집장가를 가도 서로 아는 이들이고 초상을 치루면 동네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동네 양지바른 곳에 모셔야 했다.

  이제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른다. 집 앞에 가서 문을 두드려도 잘 열리지 않는다.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다. “집에 있는가?”하고 큰 기침과 함께 삐그덕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마루 위에서 한지 바른 안방 문이 열리고 들어오세요.”하던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차를 타고 삼십 분, 한 시간 가는 곳에 일터가 있고, 직장에서 돌아오면 바람도 들어오지 못하는 철문 안에 갇힌다. 한 지붕 아래 한 마당을 쓰며 사는 이들인 것 같아도 고층아파트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들리는 가족이 제일이라는 말은 자기가 약간 확대된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 땅에서의 서러운 퇴장은 점차로 늘어날 게다. 많은 이들은 깊이 뿌리내렸던 고향으로부터 뽑혀 야트막하고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옮겨가며 살고 있다. 서로가 흐르며 스치는 이들이니 깊게 사귀려하지 않는다. 일터에서 만난 이들은 일의 관계가 풀어지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땅에 가까이 살던 이들이 이젠 높이 솟은 건물에 산다. 서로 수평하게 단층에 살던 때에는 자주 마주치고 인사하고 살았지만 층이 다른 요즘은 만날 일이 별반 없다. 같은 줄에 살아도 같은 위치에서 밥 먹고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배설을 해도 나와 너는 서로 알지 못한다.

  수도가 들어온 후로 서로 만날 우물가가 사라졌다. 집마다 냉장고가 있어 남은 음식은 그곳에 넣지 이웃과 나누지 않는다. 카드가 있어 신용대출을 하지 옆집에 빌리러 가지 않는다. 허술한 문을 갈아 쇠대문을 닫으면 바람한 점 들어오지 않아 안전하다. 찾아오는 이들은 없어도 텔레비전만 켜면 즐겁게 해줄 이, 잘 생긴 이, 노래 잘 하는 이가 수두룩하다. 언제나 그들이 나를 바라보며 모든 걸 채워주니 외로울 새가 없다. 그들이 싫증나면 인터넷에도 가득하고 휴대전화에도 재밌는 일들이 널려있다. 나는 그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그들은 나를 모른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이어폰을 끼고 산다. 혼자 걸어가며 대화하니 이상하다. 밤이 되면 턱 밑에 불빛을 비추며 무언가를 하는 모습이 그 옛날 귀신놀이를 하는 것 같다. 잘 익은 옥수수 알처럼 서로 의지해 살아가던 이들이 언젠가부터 상자 속 포장된 사탕처럼 저마다 살아가며 함께 살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 달 동안 우리 집에 온 손님도 얼마 되지 않는다.

잠은 저 멀리 달아나고 생각은 많아지고 이 땅을 떠나간 얼굴도 모르는 서러운 그 사람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마음이 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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