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

K 형, 한 번은 깊은 고민을

변두리1 2019. 5. 21. 13:30

K , 한 번은 깊은 고민을

 

  지난 212일 새벽이었습니다. 시간도 기억하고 있지요. 540분이 조금 안 되었을 때였지요. 또렷하게 최 목사님, 계세요?”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헌데 그 목소리가 귀에 익었습니다. 누굴까, 서너 분의 인상이 스쳐 지났습니다. 관계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릅니다. 두 최 목사와 김 목사를 지나 K 형이 떠올랐고 그렇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아니, 그분이 이 시간에 왜하는 의문이 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대문이 잠겼습니다. 목소리가 약간 서글픈 듯도 했습니다. 오후 내내 참았다 잠들기 전에 아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튿날에는 지인 한 분에게 지나는 투로 전했습니다. K 형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통화를 할까 했지만 생뚱맞아 하지 못했습니다. 열흘쯤 지나 밴드에서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면 한 주일에 한 번꼴로 만나니 첫 주에 대화를 나누어야지 결심했습니다. 누구나 한 번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내 할 일을 해야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두어 주 K 형은 강좌에 참여치 않았습니다. 그 결심이 약해지고 어느 순간 잊기도 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100여 일이 지나갑니다. 더 이상 늦추기 어렵고 대면해 말하는 것보다 시간을 절약하고 보존성도 가질 겸 글로 써보려 합니다. 예전에 한 모임에서 수술을 앞둔 연만하신 분께는 사후를 준비해 두시는 게 좋지 않겠냐 했습니다. 두 해 전에는 존경하는 분이 입원한 후로 찾아뵙고 한 번 내 할 일을 한다는 것이 차일피일하다 그분이 황망히 삶을 마감하셔서 아직도 후회가 남고 빚을 갚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만큼 살고 나서 느끼는 바가 준비하는 게 지혜라는 겁니다. 어떤 일이든 준비하면 좀 더 잘할 수 있고 덜 당황합니다. 처음 맞이하는 일은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여러 경우의 수를 준비해두면 침착하게 임할 수 있고 덜 불안합니다. 어쩌면 인류가 종교를 갖게 된 것이 두려움과 불안에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근대를 지나며 인간은 과학에 힘입어 많은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벼락과 지진, 홍수와 가뭄, 태풍과 해일 같은 재해의 원인이 알려지고 무서운 질병들도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제 인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두려움은 죽음일 겁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제가 알고 믿는 대로 피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죽음까지는 모든 종교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기까지는 종교는 선()하게 살자는 가르침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어쩌면 죽음의 순간 이후에 참 신앙의 진가는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어느 종교는 죽음 이후의 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윤회의 세계관을 가진 일군의 종교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걸 해탈, 열반이라 합니다. 분명한 사후세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는 사후세계를 둘로 나눕니다. 크게 천국과 지옥이라 하면 그 둘을 가르는 이가 절대자 곧 신입니다. 그 신이 없다는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이가 무신론자입니다. 신을 믿는 이들은 그분이 삶의 바닥이 되어주어, 삶의 바닥이 분명합니다. 때로 흔들리기는 하지만 끝없이 추락하지는 않고 넘어져도 끝내 일어납니다.

  바닥이 든든하고 궁극적으로 내 편인 신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는 말은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분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들과의 단절을 안타까이 여겨 관계회복의 길을 연 것이 예수요 십자가입니다. 그 마음을 알아 내민 손을 잡는 게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게 믿음입니다. 단절을 잇는, 관계를 정상화하는 이가 그분이 보내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있는 이가 그분의 사람이고 천국의 국민입니다.

  착하게 살았는가,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끼쳤는가가 아니라 그분과 통하는 존재인가가 핵심입니다. 철 성분의 물건이 자석에 붙듯, 그 날 천국에 속할 이들이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선악으로 판단 않는 이유는 천국에 어울리려면 온전히 선해야 하는데 누구도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모두 불합격인 수준이어서 새로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준으로 다시 세운 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인류의 채무증서를 그분이 찢어 무효화한 겁니다. 그 행위를 수용하는 이들은 빚 없는 자유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천국의 시민입니다.

  죽음은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는 겁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만 천국의 확신이 있는 이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원으로 가는 길을 찾아 영원을 사는 이들은, 그 삶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다른 이에게도 알려주려 합니다. 그걸 전도라 합니다. 그 비밀을 알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이들은 삶의 가장 큰 목적을 이룬 것이어서 그 기쁨과 감사로 살아갑니다. 불안 속에 천국가려고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약속을 믿고 생활 속에 체험하며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홀로 살다보면 그 감격과 기쁨이 약해질 수 있어 새 힘을 얻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드는 건 규모가 커져 힘과 이권이 생길 때입니다. 작을 때에는 핍박을 받아도 그 순수성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힘이 있으면 위기를 맞습니다. 교회가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 때 세상과 교회는 함께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상과 반대처럼 보입니다.

  K , 미리 깊이 고민하셔서 죽음 후에 천국의 삶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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