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

고난을 묵상하며

변두리1 2019. 4. 20. 22:45

고난을 묵상하며

 

  고난주간이다. 한 주간을 경건하게 고난을 묵상하며 살라고 한다. 그 의미가 무얼까.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기도하다 잡히시어 밤새 심문을 받고 금요일 슬픔의 길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셔 오전 아홉시에 처형되시고 오후 세시에 운명하신다. 당시의 많은 이들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그분이 메시야가 아닐까하는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분은 여느 죄수와 다름없이 죽임을 당하심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까지 군중들의 기대는 전복이요 반전이었다. 메시야가 지고 죽임을 당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구원자는 강해서 이겨야 하고 정복하고 다스려야 했다. 로마를 무릎 꿇리고 민족의 자존심을 살려내는 용감무쌍한 장수요 그 다음에 왕이 되는 게 순서다. 옛날의 다윗 같은 이가 메시야의 전형이었다.

  영웅적인 주인공이 도중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가. 초반에 버림받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을 겪지만 그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민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버림받은 땅으로 돌아오는 게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믿음의 이야기는 관계가 중요하고 그 알맹이는 떳떳함이다. 기계는 고장 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서로의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거리낌이 생기고 당당할 수 없다. 구약의 사람들은 그걸 죄라고 했고 드러내 처리한 후에야 서로 떳떳하고 당당했다. 미해결인 채로 세월이 흐르면 정상적 관계회복은 더욱 어려워진다. 드러냄과 해결이었다. 그 과정을 치르고 나면 서로 떳떳할 수 있어 고쳐진 명품처럼 빛날 수 있었다. 해결의 방법은 넘겨줌이다. 내 잘못을 제물에 넘겨 그 제물을 죽임으로 문제를 소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할 만큼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그 분이라는 표현과 설득이 가득하다. 인류와의 화해를 위해, 사람들을 떳떳하게 하려고, 모든 문제를 넘겨주어 해결하기 위해, 죽으러 온 이가 예수님이라는 게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믿어지지 않았다. 열두 제자들도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눈치 채서 너희가 이제야 믿는구나하고 예수께서 감격과 탄식을 동시에 쏟아냈다. 관계를 회복하려 보냄 받은 이가 예수님이라는 걸 알았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 죽임 당하실 줄은 그때에도 분명히 알지는 못했다. 이야기 중에 죽음에 대한 언급이 부쩍 늘어나고 달려야 한다, 들려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지만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살다가 벗어나는데 그 절기 유월절과 고난주간이 겹친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이집트인들의 맏아들과 동물들의 맏배가 죽임을 당할 때, 저들은 양을 잡아 피를 흘림으로 자신들의 죽음을 대신했다. 그 양이 희생당한 어린 양인데, 예수가 그 희생양이라는 게다. 역사와 생활 속에 선명히 남아있었지만 알아볼 수 없었다. 눈이 가려져 못 본 게다. 가장 무거운 형벌이 사형이다. 그보다 더 무거운 형량은 없다. 인류를 위해 그분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냥꾼이 샘에서 물을 마시는데 뱀이 입속으로 들어가 아무 약을 써도 효험이 없어 다시 그 샘에 가서 물을 마시게 하고 그 순간 머리에 있던 꿩의 깃털을 뽑아주니 뱀이 빠져나갔다고 하여 병이 씻은 듯 나았다는 우리 옛이야기가 있다. 사실이 아니라도 관계의 확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꿩의 깃털이 사냥꾼을 낫게 했다면 예수의 죽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살아가게 한다. 병이 낫듯, 고장 난 기계가 고쳐지듯 제 기능을 회복해 이 땅에서부터 본래의 형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며 산다는 건 정복하고 빼앗고 통치하려는 세상의 흐름에서 거꾸로 살아보려는 노력이 아닐까. 여태까지 영성의 사람들이 보여주던 한적한 곳에 들어가 금식하고 자신을 괴롭히며 그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는 자세가 꼭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을 내주고 비워 서로의 평화를 이루며 복음을 확실히 아는 게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제자들처럼, 복음을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눈에 가려진 비늘을 벗겨 진실을 보게 하는 거다. 조용히 이 땅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는 명품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일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했다. 이 땅에서 증언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인정과 확인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만큼 중요한 것이 고난이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죽음을 거치지 않으면 부활에 이를 수 없다. 하루하루 진지한 성찰 속에 그분의 죽음을 생각하며 조금씩 닮아가는 삶이 고난을 묵상하며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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