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다 알았습니다(우리아의 고백)
암몬과의 전투를 위해 랍바에 와 있다. 어느 날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시커멓고 커다란 뱀이 벌거벗은 아내의 몸을 휘감고 있었고 아내는 괴로움인지 즐거움인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꿈인지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총사령관 요압에게서 자신의 집무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요압은 왕이 특별히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며 열흘간의 휴가를 줄 테니 왕도 뵙고 아내와 함께 잘 지내고 오라고 했다.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할 때에 예쁜 아내를 두면 피곤한 법이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출전한지 두 달이 넘어 예루살렘에 다시 오지만 큰 변화는 없다. 왕을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모든 절차가 일사천리(一瀉千里)다. 왕궁입구에 비서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왕의 집무실로 곧바로 가는데 거치는 곳 만나는 이들마다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뭔지 모르게 약간 기분이 상했다. 왕은 나를 보자 먼 길에 고생이 많았다며 포옹을 하고 또 악수를 했다. 과장한 듯 한 몸짓이 조금은 멋쩍게 느껴졌다. 왕은 전황과 요압의 안부 등 간단한 것을 묻고는 내게 칭찬과 격려를 하면서 어려움은 없는가를 물었다. 환담을 마치자 왕은 결혼은 했는지 자녀가 있는지 확인하고는 인생에서 자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얘기하면서 속히 집에 가서 아내를 즐겁게 해 주라며 수행원들에게 많은 진귀한 술과 음식들을 들려서 나를 따르게 했다. 나는 왕궁수비대에 들러 수행원들에게 내 생각을 밝혀 그들을 돌려보내고 그곳 병사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곳에서 잤다. 누워 눈을 감고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근무를 마친 한 병사가 내게로 오더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실눈을 뜨고 그 병사의 손을 잡았다. 그 병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입에 손을 갖다 대고 조용히 일어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그 병사를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해서 아내와 왕의 관계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아내를 왕궁에 호송하는 일을 몇 차례 수행했다고 했다. 겁에 질려 애걸하는 그 병사를 위로하고 복잡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보냈다.
날이 밝자 왕은 또 다시 나를 왕궁으로 불렀다. 왕의 속셈을 밝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 나를 집으로 보내 아내와 잠자리를 하게 하여 왕으로 인한 아내의 임신을 감추려는 의도가 뻔했다. 왕의 집무실로 가면서 보니 어제는 몰랐지만 많은 수의 군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왕의 집무실에도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온 몸의 신경세포가 일제히 긴장하고 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는가가 큰 문제였다. 왕의 이야기도, 술과 음식도 관심에 없었다. 왕은 쉴 사이 없이 지껄이니 적당히 반응을 보여야하고 술과 음식도 권하면 거절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기회를 잡아 전쟁터로 빨리 가고 싶다고 요청을 했다. 왕은 뜻밖이라는 듯 불편한 것이 있는가 묻고는 하루라도 더 있자고 했다. 밤이 깊어 군 생활 중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있는 곳을 찾아 갔다. 그는 나의 방문에 놀랐지만 곧 편안한 친구사이로 돌아갔다. 밤늦도록 사정을 이야기했다. 친구도 대충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내와 왕의 일은 알만한 이들은 다 눈치로 알고 있는 알려진 비밀이었다. 친구는 내가 어떤 결정을 해도 지지할 것이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청하라며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군사는 이천 명 정도라고 했다. 친구와 이야기 끝에 날이 다 새어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 왕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침부터 나를 불러서 종일토록 같이 술을 마셨다. 나도 왕과 거의 같은 양의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술이 취할 리 없었다. 왕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혀 꼬부라진 말도 했지만 그것은 왕을 향한 눈속임이었다. 왕도 완전히 긴장을 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불편한 위선의 자리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왕은 밤이 깊어 가마를 대령하여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게 했다. 그러나 왕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내려 나는 왕궁수비대로 그들은 자기들 거처로 돌아갔다.
날이 밝자 나는 작지만 예리한 칼을 갑옷 속에 지니고 왕을 만났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나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왕은 내게 대한 자신의 기대와 신임을 표현하고 요압에게 자신의 친서를 전해줄 것을 부탁하며 나를 송별했다. 왕은 헤어지면서 다시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 순간 내 갑옷 속에서 칼이 삐죽이 솟아 나왔다. 순간 왕의 안색이 납빛으로 흐려졌고 나는 빙긋 웃었다. 왕은 집무실 밖에까지 나와 나를 전송했다. 랍바로 오는 길에 점심때가 되어 들른 식당에서 그 칼로 왕의 친서를 열어 보았다. 나의 예상과 같았다. 흔적 없이 다시 봉한 친서를 요압에게 전달했다. 친서를 뜯어 읽은 요압의 태연함도 대단했다. 왕과의 친척관계도 있고 가장 오래된 충신이요 제일 신임 받는 총사령관이어서인지 내공도 보통이 아니었다. 요압은 왕의 안부와, 휴가를 더 즐기지 않고 일찍 돌아온 연유를 간단히 묻고는 아내는 만나 보았는가를 확인했다. 모두가 의례적인 말들이었다.
내 막사로 돌아와 많은 생각을 했다. 힘들고 어려워도 왕을 처단할까, 아내는 어떻게 하나, 아내야 스스로의 선택권이 없었으니 뭐라고 할 것이 없다. 왕으로 인한 임신에 걱정하고 내게 미안해 할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불쌍했다. 부대에 왕의 비리를 폭로하고 요압을 비롯한 지휘부를 살해하고 나도 죽어 버릴까, 그것은 죄 없는 이들을 해치는 것이고 내 군 생활을 오점으로 끝맺는 것이며 친인척들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는 것이다. 군을 벗어나 도망가 살아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없어지면 모두가 편할 것 같았다. 아내도 문제가 없고 본가도 처가도 무사할 것이다. 혼자 조용히 죽으려 하니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다. 이왕 죽으려 하는 것, 암몬 사람들이나 여럿 무찌르고 죽으면 오해의 여지도 없고 좋을 것 같다. 왕이 해결책 하나는 제대로 찾아 준 셈이었다.
내 생애 최후의 날을 맞았다. 나는 부하들에게 출전하기 전 비장한 마음으로 한마디 남겼다. “군인답게 살고 군인답게 죽으라.”고. 전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 내 담당이었다. 나를 대하는 총사령관 요압의 표정이 민망함으로 가득했다. “총사령관님,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나 오늘 죽을 겁니다. 그게 오늘 내 임무예요.”요압을 향해 농담하듯 한마디 쏘아 붙이고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전투가 가장 극심한 곳으로 뛰어갔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내가 생애 최고의 속력으로 적진을 뚫고 칼을 휘두르며 내달릴 때 많은 적군들이 짚단처럼 쓰러졌고 깜짝 놀란 적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화살을 당겼다. 얼굴로, 가슴으로, 눈으로 날아오는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나는 랍바성 바로 아래에 쓰러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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