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들 살지 못하랴(레아)
남편의 하나님이 떠나온 고향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셨단다. 남편과 나 그리고 동생이 모여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실상은 그분의 일하심을 지난 수년간 보아온 터라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분이 돌아가라고 하면 남편은 돌아갈 것이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결정은 남편을 따라 나설 것인가 이었는데 그것도 벌써 우리사이에 여러 자녀들이 있으니 갈 수밖에 없다. 동생은 어린 아들 하나뿐이니 남겠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남편과의 사이가 좋으니 당연히 함께 가기를 원했다.
우리의 재산이 급격히 늘어나 친정식구들과 함께 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더욱이 우리의 가축과 자녀, 노비가 많이 늘어나 친정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 같다. 최근 들어 잦아진 다툼에 남편이 많은 고민을 했는데 남편에 속한 이들이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의 방향이 잡힌 것이다. 문제는 정들었던 고향을 정상적으로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동네사람들에게 그동안의 고마움도 전하고 서로 아쉬움을 나누면서 헤어지고 싶은데 남편은 그것을 위험하다고 한다. 살아생전 다시 못 올 지도 모르는 먼 길을 떠나면서 친정집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도망치듯 가야하는 우리 형편이 너무도 초라하다.
친정아버지도 어지간하지만 남편도 호락호락 밀리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이십 년을 서로 매일처럼 얼굴을 맞대고 살던 이들인데 성대하든 조촐하든 헤어짐의 의식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재산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사람노릇마저 못해야 하는가. 서로 부딪치면 그게 그거지 딸네에게 좀 더 준들 어떻고 처갓집에 보태주고 간다고 탈날 것은 또 뭔가.
남편의 주장이 워낙 강한데다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데야 그대로 따라주는 것이 상책이다. 떠나기 위해 짐을 챙겨도 마음이 허전하고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내일이나 모레면 나면서부터 살아온 고향을 등진 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날마다 보던 들와 얼굴들을 떠나서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남편이 있고 든든한 아이들이 있어서 남편의 고향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그 어떤 곳으로 간다고 해도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모님을 향한 죄스러움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그분들은 좋은 얼굴로 헤어지지 못함을 얼마나 마음아파 하실까. 생전에 한번 다시 볼 수는 있을까. 두 딸과 여종들, 외손자들을 한 순간 잃었다고 허전해하고 서운해 하실 모습이 눈앞에 너무도 선하다. 내일은 한 번 더 남편을 설득해 보아야겠다.
짐 싸는 일을 대충해 놓고는 우리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내 아들 여섯과 딸 하나, 모두 모이니 한방에 그득했다. 그들은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에게 이번에 떠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우리가 떠나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래도 큰 아이들은 이해가 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목적지가 아버지의 고향이라고는 해도 우리에게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타향이고 사람들도 철저히 새로 익혀야 하고 그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도 조금씩 사태를 파악하는지 그냥 이곳에서 살면 안 되냐는 말들도 있었다. 일행 중에 우리가 다수이니 중요한 일들을 맡아야 할 것이란 이야기도 했다. 우리 일행을 지켜주는 이들은 없고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는 이들은 많을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형제들끼리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당부를 단단히 했다. 서로가 돌아보고 챙겨야 함께 살 수 있는 다른 무엇보다 강한 운명공동체가 나와 우리 자녀들의 관계다. 아이들도 동네 사람들과 친했던 동무들에게 작별의 인사도 할 수 없다는 말에 몹시 서운해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을 떠난다는 사실이 사전에 알려지면 겉잡을 수없는 일들이 생기고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계획이 알려지는 것을 막고 하루 밤이라도 친형제들이 같이 있도록 내방에서 모두가 자라고 했다. 한군데에서 모든 자녀를 편안하게 보는 것도 앞으로는 쉽지 않을 듯하다.
낮의 생각이 꿈으로 이어졌는지 우리 일행이 길을 떠나고 있었다. 어디쯤인지 며칠이 되었는지 몰라도 우리가 넓은 들판에 임시천막을 치고 머물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인지 맞은편에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우리 쪽으로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고 우리들은 쫓기듯 불안하고 초조했다. 우리는 대항할 군사들도 없고 마땅히 피할 곳도 없었다. 남편도 당황하고 걱정하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타까웠다. 그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친정집 사람들이라고도 했고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도 했다. 놀라 잠이 깨서는 서로 좋게 헤어지는 길은 없는가를 한동안 다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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