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위한 나의 준비(라헬)
수일 내로 정든 땅을 떠나 물설고 낯 설은 남편의 고향으로 간다. 우리 가정만 조용히 가는 것이 아니라 가축과 재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라 금방 눈에 띄고 남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언니와 그들 사람들은 성실하고 생활력이 있는데다 다수이니 어떤 식으로든 적응에 문제가 없을 게다. 문제는 우리다. 나 자신과 외아들, 내 노비와 그 자녀를 합해도 소수를 면치 못하고 생활력도 강하다고 할 수 없으니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남에게 밀리고 눈치 보며 사는 것은 싫다.
이 곳 내 고향에서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누구에게 기죽어 살아오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우리 가문과 내 개인적인 매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유력한 가문과 친화력 그리고 경제적 힘이다. 남편의 고향에서 제대로 살기위해서 필요할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힘없는 소수들이 살아가는 원리는 어느 곳에서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크게 보면 남편의 가문은 그곳에서 꽤 알려져 있는 듯하니 사회적으로 그다지 무시를 당할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내부의 주도권을 누가 갖는가이다. 이 마을에서는 많은 이들이 내 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는 인심이 누구에게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언니보다 유리한 것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내 아들도 기가 죽어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 때 내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이다. 어쩌면 내 모든 고민을 일시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의 주도권,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것,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수호신 드라빔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가 가문의 주인이다. 지금껏 살아온 친정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보다는 낯선 땅으로 가는 내게 더 필요한 것일 게다. 그 수호신이 그것을 소유한 이에게 큰 힘을 베풀어준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경제적 가치로도 적지 않다. 이곳의 삶을 살아본 이들은 적어도 그것을 소유자의 영향력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부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큰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이 땅을 떠날 최대의 준비는 드라빔을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넣는 것이다. 다른 준비는 내가 없어도 조금도 차질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 드라빔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가문의 것이지만 아주 위험한 일이다. 항상 눈에 띄는 곳에 모셔두는 것이니 없어지면 바로 표시가 난다. 가문의 상징이요 보물이니 되찾으려는 노력도 만만치 않으리라.
드라빔을 내가 소유하려는 것은 내 위상과도 연관이 있지만 아버지와 오빠들을 궁지로 몰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특히 내게 최근 들어 그들이 보여준 태도는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고 나로 하여금 서운함을 느끼게 했다. 어떻게 하든지 그들로 자신들의 행위를 후회하게 만들고 싶다. 그들이 어려움을 겪고 망신을 당하는 것을 멀리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할 듯싶다.
듣기로는 아버지와 오빠들은 양털을 깎으러 갔단다. 그 일은 며칠이 걸리는 그 해의 가장 큰 행사다. 우리는 남편의 성격이나 상황으로 보아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면 출발할 듯하니 시간을 따지면 오늘밤이 가장 좋은 기회이다. 이 일은 나 혼자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남편도 알아서 좋을 일이 없다. 노비 하나라도 데리고 가면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니 비밀리에 처리해야만 한다.
밤이 깊었다.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늦게까지 일하는 이들이 있다. 한밤중을 넘어 선 때에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친정을 찾아가는 것은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침 그믐께에 구름이 껴 내 모습을 감춰주니 고마울 뿐이다. 멀다고 생각지 않은 길이 꽤 시간이 걸린다. 드라빔을 모셔둔 곳은 집에서도 안쪽이다. 한밤중이라도 누가 깨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고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다행이 집에 도착하기까지 중간에 아무도 만나지도 않았고 집에도 어른들과 남자들이 없어서인지 문도 잠기지 않았고 깨어있는 이도 없었다.
드라빔이 모셔진 곳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니 한참이 지나니 눈에 익은 모습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몸이 기우뚱하고 손이 저릿했다. 손에서 드라빔이 떨어지고 쩔그렁 소리가 정적을 깼다. 놀라서 한동안 숨죽이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다시 조용히 집어 들어 가슴에 품고 익숙한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온 몸에 땀이 배어 있었다. 아직도 어두운 마을길을 지나고 들길을 건너 그믐밤 하늘의 구름을 고마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들고 남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내가 직접 들고 갈 짐 속에 그것을 깊숙이 넣었다. 이제라도 깊은 잠을 한숨 자두어야지. 긴장이 풀리고 일시에 피곤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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