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은망덕한 녀석(라반)
즐겁고 넉넉하던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분노가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양털을 깎으며 느꼈던 여유와 흥겨움은 집으로 돌아올 때 주변 들판의 이상스런 고요로 잦아들고 있었다. 한 해의 풍요로움을 고하려 드라빔을 모신 곳에 들어갔을 때, 내 놀라움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늘 주변을 압도하던 신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집안사람들도 모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들들도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 같았다. 짚이는 바가 있어서 아들들을 데리고 야곱이 양을 치는 곳으로 내달았다.
없었다. 양들이나 사람들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기거하고 일하는 곳들을 다 돌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양들과 낙타 그리고 노비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도망을 간 것이다. 자기 것을 몽땅 챙겨서 고향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나와 아들들이 양털을 깎으러 간 틈을 타서 제게 속한 모든 것을 가지고 간 것이다. 게다가 우리 가문의 가장 소중한 드라빔마저 훔쳐서 간 것이다. 이들 외에는 감히 드라빔을 손댈 이들은 없다. 이들 중에도 야곱이나 내 두 딸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성정 상 그런 일을 저지를 아이가 아니니 야곱이 아니면 둘째일 것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어찌 이토록 모질고 악하단 말인가.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라고 하더니 그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이들도 사태가 짐작이 되는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이들과 들판에 주저앉아서 상황을 확인하고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서로가 이론(異論)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 눈치가 심상치 않고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우리의 빈틈을 보아 드라빔까지 훔쳐서 도망을 간 것이라는데 의견이 완전히 일치했다. 하나같이 격분했다. 우리에게 올 때 혈혈단신 고아처럼 빈 몸으로 왔다가 가축과 처들과 아이들에 넘치는 재산까지, 그 모든 것이 우리덕인 것을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느냐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가능한 젊은이들을 동원해 쫓아가서 혼을 내주고 드라빔을 비롯해 우리 것을 찾아오자고 결정했다.
집에 돌아와 사람들을 모으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서 함께 그들을 추격할 이들을 모으니 하나같이 가겠다고 해서 오히려 인원을 줄여서 정예부대로 선발했다. 그들은 많은 가축들과 여인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있으니 멀리는 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불과 며칠 안에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솟는다. 그 녀석이 내게 온 이후로 내 아들들보다 서운하게 한 것이 없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두 딸을 모두 저에게 주고 내 재산을 얼마나 많이 떼어 준 것인가. 이제는 우리 가문과 재산을 거의 겨룰 수 있게 된 것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재산인가. 다른 것은 몰라도 드라빔을 훔쳐가는 것은 전혀 사람답지도 못한 일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 가문의 지배권을 나타내는 것이요, 가문 사람들이 모두 주시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았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망신스러운 것인가. 나를 다른 이들이 가문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타당한 명분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녀석도 밉지만 딸들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 큰 일들이 진행되는데 어떻게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고 알려주지 않는단 말인가.
벌어진 일의 처리가 간단치는 않아 보인다. 전속력으로 추격을 하니 내일이나 모레면 따라 잡을 테지만, 그 다음에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딸들과 손자 손녀들을 집으로 데려가고 양과 낙타와 노비들을 빼앗아 올 때처럼 빈 몸으로 보내고 싶다. 하지만 딸들만 해도 생각처럼 될는지는 모른다. 필사적으로 그 녀석을 따라가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 녀석과 겨루어 이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분명히 어느 모로 보아도 내가 유리한 것 같지만 항상 그 녀석에게 졌다. 드라빔이 한 번도 문제된 적이 없다고 녀석들이 도망을 가면서 없어졌으니 그들의 소행이 분명하지만 물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그 녀석의 부친이 섬긴다는 하나님이 녀석과 함께 하면 내 계획이 허사가 될 지도 모른다.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 세월은 흐르고 숨 가쁜 추격 중에도 밤이 찾아온다. 피곤이 몰려오고 짐승들도 지쳐서 먹이를 먹고 수면도 취해야 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며칠을 이동하니 몸이 지치고 정신이 몽롱하다. 낯선 들판에 머물러도 쏟아지는 잠을 감당하기 어렵다. 자리에 누우니 바로 곯아떨어지고 생각지 않은 꿈을 꾸었다. 그 녀석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이 나타나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꿈을 깨고도 그분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하다. 어쩌란 말인가.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니, 그러면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사실을 확인하고 내 것을 찾아오리라.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할 말은 해서 잘잘못을 가리고 딸들과 조손들 문제도 잘 해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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