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야곱

위기의 순간을 넘기다(라헬)

변두리1 2016. 3. 19. 00:01

위기의 순간을 넘기다(라헬)

 

   고향을 떠난 지 열흘이 되었다. 양털 깎기가 이렇게 오래도록 계속될 리는 없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실로 받아들였는지 친정에서는 추격해오지 않는 듯하다. 그래도 이상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드라빔이 없어진 것을 모를 리 없고 안다면 반드시 찾으러 올 것인데 아무 움직임이 없다. 야곱은 고향이 그리운 것인지, 안전지대에 한시라도 빨리 도달하려는지 일행을 휴식도 없이 몰아세운다. 우리가 머무는 곳이 길르앗 산이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안전지대에 가고 싶은 것은 내가 더 간절하다. 어젯밤 남편은 이 속도면 내일이면 고향땅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늘 하루가 문제다.

 

   새벽녘에 앞산에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고 했다. 어제 저녁만 해도 없었던 많은 이들이 밤사이에 산속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왠지 불안했다. 아침이 되자 그들을 살피러 갔던 이들이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버지와 오빠들 그리고 가문의 젊은이들과 노비들이라는 것이다. 정신이 아득하고 어지럽다. 기어이 사태가 이렇게 되고 말았다.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가 된 셈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힘으로 부딪치면 우리의 피해가 클 것이다. 불안한 시간이 흘러가고 그들이 형태를 갖추더니 아버지를 선두로 오빠들과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 쪽에서도 만일을 대비해 진영을 갖추고 남편과 언니와 나 그리고 아이들이 마중을 나갔다. 아버지는 남편을 향해서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소리쳤다. 이십년을 같이 살았고 자신의 두 딸을 아내로 주고 그들로 자녀들을 낳았고 모든 재산을 처가에서 모으고는 어찌 한마디 말도 없이 몰래 도망치면서 전쟁포로처럼 끌고 갈 수 있느냐고 힐책하면서 그것까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처가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훔쳐 갈 수 있는가를 힐문했다. 남편은 숙이고 들어갔다. 내가 이야기하면 처가에서 아내들을 데려가지 못하게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며 드라빔을 훔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만일 누구에게서 그것이 나오면 그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무엇이든 처가의 물건이 나오면 가져가라고 했다.

 

   짐 수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오빠들은 다른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남편과 언니, 나 그리고 우리 둘에게 준 여종의 짐만을 뒤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가 당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드라빔과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편의 거처와 짐들을 한동안 샅샅이 살폈다. 그 후로 언니의 거처와 짐들을 잠깐 둘러보고 두 여종의 것들을 살피고 내 거처로 왔다. 나는 불안하고 얼굴이 덥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 드라빔이 내게 있었고 나는 그것을 내가 타고 앉은 낙타 안장아래에 감춰두고 있었다. 그들은 내 짐들을 꼼꼼히 살피더니, 몇 가지를 다시 조사했다. 아버지가 내게로 와 낙타에서 내리라고 했다. 난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생리 중이라 내릴 수 없어 죄송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한참을 말없이 그 자리에 서 계셨다. 나는 입술이 마르고 목이 타고 숨쉬기가 힘들고 어지러웠다. 오빠들도 내게로 왔다. 영문을 모르는 오빠들이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상황파악을 하려는 것 같았다. 마침내 아버지가 그렇구나, 항상 몸을 조심해라.”라고 말씀하시며 남편 쪽으로 돌아 서셨다. “미안하네, 너무 당황해서 자네에게 실수했네. 모두 찾아보았지만 없었네.”남편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처가에서 겪었던 부당한 일들과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가를 얘기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으면 자신은 빈손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듣고만 계셨다. 아쉬운 눈으로 우리를 둘러보시고는 지난밤에 하나님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 선악 간에 야곱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했다. 내게로 눈길을 주시며 설혹 잘못이 있다한들 다 딸이요, 손자손녀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셨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남편에게 돌을 가져다 무더기를 만들어 언약을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남편에게 언니와 나를 박대하지 말고 다른 아내를 얻지 말 것을 요구하고 서로가 그 돌무더기를 넘어 상대를 해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하나님으로 증인을 삼아 굳은 맹세를 하고 그곳을 맹세의 돌 더미라고 이름 붙였다. 문제는 해결되었고 위기는 지나갔다.

   남편은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떡을 만들어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서로의 오해가 풀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작별의식을 치룬 셈이다. 내게는 너무도 아찔하고 힘겨운 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딸들을 향한 따듯한 면을 볼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회였다. 오늘밤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도 같고, 떠나온 고향과 부모님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할 듯도 한 밤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정말로 벗어나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고향에서의 많은 일들과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한 여러 장면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그런데, 이 난리를 치른 드라빔은 어떻게 해야 하나. 새로운 걱정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