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읽고

블랙독을 잃고(황당했던 그 날 오전)

변두리1 2015. 12. 19. 13:37

블랙독을 잃고(황당했던 그 날 오전)

 

  몇 사람이 함께 그림책을 읽는 날이다. 정해진 그림책은 레비 핀 폴드의 블랙독이다. 준비를 마치고 느긋하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꺼내려 하는데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그래도 10여 분의 여유가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다. 책에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니니 어디 갈 리도 없지 않은가. 한 번 더 있을 만한 곳을 뒤져보아도 없다. 시간에 맞춰 가기도 빠듯하다. 슬며시 오르려는 화를 누르고 다시 책상 위와 늘 보던 서가를 훑는다. 없다. 대여한 책이고 연장까지 했는데 신경이 쓰인다.

 

  아내는 책 없이 그냥 가라고 한다. 한동안의 혼란을 치르고 나서 아내는 며칠분량의 신문을 아침에 내놓았는데 거기에 함께 들어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랬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수일 전에 읽고는 신문 두는 곳에 두었었다. 예전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무엇을 버리시기 전에 항상 그것을 버려도 되는지 내게 물으셨다. 아내는 하는 일이 많아 대충 자신이 판단해서 처리한다. 어쩌다 신문을 세 종류를 보고 있어서 며칠만 밀려도 상당한 분량이 된다. 나 스스로 잘 정리를 해 놓아야 하지만 잘 하지 못한다. 수습을 해야 한다. 신문을 내 놓은 곳에 가 보니 벌써 수거해 갔다. 동네 일을 잘 아는 마트에 가서 물으니 수거해 가는 이에게 수차 연락을 취해 간신히 연결이 되었지만 그날은 서울에 가있고 수거하지 않았단다. 이 지역을 수거하는 또 다른 분은 오토바이로 수거해 바로 고물상으로 가 처분한단다. 그분에게 연락해 고물상을 가볼까 하다가 연락처를 탐문하는 것도 쉽지 않고 시간과 노력을 감안하면 배상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아서 책 찾기를 포기했다. 그 책을 확인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필요한 때 쓰지 못하고 절차에 따라 재구입해 반납했으니 이제 어디에서 나온다고 해도 잃어버렸던 것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한 그림책의 존재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내 자신이나 우리 아이들도 그림책 세대가 아니다. 아이들 책이라고 하면 글이 대부분이고 내용에 맞추어 삽화정도가 들어간 동화책이 다였다. 그런데 시대가 달라져 있었다. 우연히 독서지도사 강좌를 들었는데 그곳에도 자본주의의 영향은 강력해서 내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유치중등 학생지도를 목적으로 하는 독서지도 같았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림책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는데 그 사촌격인 그림책은 흥미롭게 다가왔다. 접근이 쉬울 뿐 아니라 영아부터 노인까지 전 연령대가 볼 수 있는 분야였다. 또 그런 그림책을 함께 읽는 모임을 소개받아 열심히 참여하는 중에 이런 소소한 일이 생긴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이야기꺼리가 생긴 것은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 일을 핑계로 해서 레오리이니의 티코와 황금날개를 구입했다.

 

  「블랙독은 무지에 의한 맹목적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어느 날 아침 호프아저씨 집 앞에 검둥개 한 마리가 나타난다. 아저씨는 그 개를 보고 호랑이만한 개가 나타났다고 놀라고 그 부인은 코끼리만한 개라고 소리치며 놀란다. 아이들도 공룡만한 개, 심지어는 어떤 정체도 없는 제피만한 개라고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이불 속으로 숨는다. 막내인 꼬맹이는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문을 열고 개에게로 다가간다. 검둥개는 크기는 하지만 두렵거나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꼬맹이와 친해진 검둥이는 호프아저씨 집에 오고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감을 느낀다. 검둥개는 그렇게 크지도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정확한 실체를 모르고 대상과 직면하지 않아 두려움이 커지고 확산된다는 것이다. 그 두려움을 해결하는 이가 막내인 꼬맹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듯하다. 기존 지식에 젖어있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직시하기가 오히려 어렵다. 어린 막내 꼬맹이는 아무 선입견이나 두려움 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검둥개에게 다가간다. 그리고는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다. 여러 가지 이유를 열거하면서 현실과 부딪치기를 회피하는 이들에게 도전과 격려가 될 수 있는 면이다. 이런 면은 어린이 청년뿐 아니라 나이가 든 모든 이들이 새겨두어야 할 사실이다.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현실 혹은 두려운 대상과 직면하는 일은 중요하다. 많은 경우 검둥개처럼 부딪쳐보면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어린 꼬맹이가 할 수 있다면 못할 이가 누가 있으랴. 직면하여 두려움을 극복하면 더 이상 블랙독이 아니다. 그때부터는 화이트독이며 프랜들리 독이 된다. 같은 대상도 사람에 따라 블랙독이기도 하고 화이트독이기도 하다. 직면해 해결할수록 블랙독이 줄어든다. 블랙독이 전혀 없는 사회도 없고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들은 여전히 블랙독이다. 커다란 자연재해, 운명, 죽음 이런 것들은 쉽게 화이트독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이런 세력들과 겁 없이 맞부딪치는 어린 막내 꼬맹이 같은 하룻강아지들이 날마다 늘어가고 가능성은 적지만 나 자신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다. 블랙독을 잃고 그들과 대면하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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