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물부득기평즉명((物不得其平則鳴)이라니

변두리1 2020. 6. 21. 21:03

물부득기평즉명((物不得其平則鳴)이라니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한유(韓愈)가 마음에 차지 않는 임지로 떠나는 벗 맹동야와 헤어지며 쓴 글의 한부분이라 한다. 무릇 만물은 균형 또는 화평을 잃을 때 운다는 것이니 기대에 못 미치는 임지에서 근무하며 감정의 출렁임 속에 잘 울어보라는 말도 되겠다.

불평즉명(不平則鳴)이니 자연의 이치다. 나무가 평온하면 고요하지만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고, 호수의 물도 잔잔하다가도 부는 바람에 소리가 인다. 아기들도 평온이 깨져 불편하면 울어 호소한다. 노래도, 울음도 다 절절한 사연이 있다는 게다. 평화롭고 안락한 상태가 아니라 불편하고 출렁이는 감정에서 문학과 예술이 더 간절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성과 합리로 통제받는 순간보다 망아(忘我)와 황홀경에서 극적인 예술성이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한하운은 문둥이가 되어 슬픈 시들을 남기고 김기창은 농아가 되어 감동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베토벤도 그러했고 사마천도 불멸의 사기를 썼고 어린 안네 프랑크는 불안과 두려움을 겪으며 일기를 적어 인류에 선물했다.

나는 조금 시각을 달리해서 불평즉명(不平則鳴)을 보고 싶다. 평등하지 않으면[不平] 운다. 차별과 부당한 처사에, 억울함과 분노가 솟구친다. 특별하거나 융숭한 대접이 아니라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개인이나 집단은 소리 지른다. 이것이 때로는 건의, 호소, 시위가 된다. 대화와 함성과 비명을 거쳐서라도 우리 사회가 좀 더 공평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고함이나 울음이 없는 평온한 사회가 좋기만 할까. 이런저런 문제가 불거지지 않으면 살만한 곳일 듯하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으리라. 공통점이 많은 집단은 평온할 수 있다. 관심사, 연령대, 정치적 성향, 종교,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이들이 함께하면 무릉도원이 이뤄질 것 같아도 현실은 아니다. 무척이나 단조롭고 무기력한 집단이 될 것이다. 고인 채로 흐르지 않는 물이 썩는 것처럼 답답하고 맹맹한 곳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불평(不平)하다는 것은 서로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이 만날 때, 적극적인 표현으로 서로 부딪치고 충돌할 때, 힘이 표출되고 창의력이 살아나며 역동성이 생긴다. 다른 경험과 가치관과 학식이 만나야 내가 못 보았던 것을 상대가 보고 내게 익숙했던 것이 모두에게 그러한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누구나 결과를 알 수 있는 승패가 정해진 경기라면 관객이 들기는 어려우리라.

불평한 곳이라야 찬란한 문화가 피어오르지 않을까. 기후가 차이 나고 자라는 풀과 나무가 다르고 지나온 역사가 상이할 때, 여행객에게 설렘과 환희가 있을 것이다. 겨울과 달라 봄이 기다려지고 가을은 여름에 누릴 수 없는 결실과 단풍이 있어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 사는 세상은 본래 평등하지 않다. 풀 나무 곤충들과 새까지 그 생김새와 살아감이 더없이 가지각색이다. 그 도가 사람에 이르면 표현이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서로 대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지 않은가. 개인의 한 평생도 누구와 별반 겹침이 없다. 불평즉명(不平則鳴)할 때,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내니 그리 힘들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들을만한 합창이 된다.

궁즉통(窮則通)이라 했던가. 당황스런 역경에 부딪히니 애써 헤쳐 나갈 방도를 찾고 그 가운데 한 가지씩 지혜와 문화가 덧쌓여간다. 때로는 재앙과 곤경이 딛고 올라갈 디딤돌이다. 일부러 내 삶을 역경과 고통으로 몰아넣을 일은 아니지만 피해갈 수 없다면 눈물과 번민 속에 한두 마디 절창(絶唱)의 울음을 뽑아내 자신의 곡조로 만들 일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선후진국 없이 평온하지 못해, 공평하지 않아 울음과 화난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 울음들 하나하나가 연둣빛 새싹이 강한 햇살에 짙어지다 높푸른 가을 하늘아래 금빛 열매를 내 보이듯 화평과 정의로운 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이요, 감동적인 절창을 낳는 산고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무릇 만물은 그 평온, 평등함을 얻지 못하면 소리 내어 우나니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그에서 다양함이 나오고 진보가 이루어진다. 그러니 싫어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다. 목을 다듬어 후세에 건네줄 절창에 이르는 한두 마디 곡조 얻어 볼 일이다. 운보처럼, 루드비히 반 베토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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