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산책길의 살구들

변두리1 2020. 7. 15. 15:51

산책길의 살구들

 

우리 동네에는 가경천을 따라 산책길이 정비되어 있다. 무료하고 머리가 뻑뻑할 때는 그 길을 걷는다. 철따라 산책길의 분위기가 다른데 요새는 노랗거나 조금 붉은 살구들이 산책길에 꽤 떨어져 발에 채이기도 하고 밟혀 터지기도 한다. 눈을 들어 보니 아직 떨어지지 않은 열매들도 가지에 많이 매달려 있다. 며칠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게다.

2500년 전 승리의 소식을 전하던 그리스 병사처럼 살구꽃은 겨울 가고 봄이 오는 것을 벚꽃보다 빠르게 달려와 알려주고 며칠 가지 않아 스러져갔다. 벚꽃과 개나리 진달래로 이어지는 천지간 황홀한 꽃 잔치에 살구꽃에 대한 허전함은 잊혔다. 돌아볼 사이 없이 이어진 초록의 행진에 초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고 그 사이 살구들은 잎과 같은 색으로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올해처럼 꽃들이 서러운 때가 있었을까? 온 힘을 모아 활짝 피워내도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찾아와 보아주는 이들 없이 피었다 지는 꽃은 관중 없는 경기장에서 소리치는 선수들처럼 애처로웠다. 그래도 풀과 나무들의 꿈은 열매에 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바라는 게 결실(結實) 아니던가. 열매 맺음이다. 열매를 위해 화려하게 꽃피는 과정이 있다. 순한 햇살과 낮은 비구름을 벗 삼아 익어간 살구들이 하루가 다르게 탐스러워져 갔다. 아마 살구나무와 열매들은 자랑스럽고 빛나는 날만 이어질 것 같았으리라. 마침내 발갛고 노란 살구들이 가지가 휠만큼 자라났다.

비 오고 바람 불던 어느 날, 먼저 익은 고운 살구들이 가지를 떠나 땅으로 내려앉았다. 몇 달에 걸친 비와 햇살과 땅의 애씀이 버무려졌으니 지나는 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예상했으리라.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무덤덤했고 발에 채이거나 밟힐 뿐이었다. 잘 익어 땅에 앉은 살구들은 어안이 벙벙하고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을 게다. 어느 곳의 살구는 알뜰히 거두어 유용하게 쓰인다는데 길거리에 나뒹굴다 사라져야 하는 가경천의 열매들이 애석하다.

가경천 물가를 가만히 바라보면 어린 살구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가지에서 떨어진 살구에서 씨가 남아 생존조건이 맞는 곳에 싹을 틔우고 자라난 게다. 그들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떨어진 열매들은 채이고 밟히며 불투명한 앞날에 불안할 게고, 자신들의 미래를 바라보는 가지에 달린 열매들은 절망을 떨쳐내기 어려울 게다. 모두가 꿈꾸었을, 모두가 도달할 수 없는 붉고 노란 열매를 맺는 일이었을 텐데. 그 결국이 비바람에 떨어져 길가에 뒹굴다 행인들에게 채이고 밟힘으로 끝나야 하는 것인가.

그 순간까지 이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산책로에 뒹구는 열매들은 나름 삶의 목적을 이룬 성공한 존재들이다. 한동안 산책길을 노랗게 물들이던 그들이 사라지고 나면 또 오래지 않아 청청함을 뽐내던 푸른 잎들이 누렇게 되어 땅으로 낙하할 게다. 떨어져 내리는 이들은 제자리를 지키며 꿋꿋이 살아남는 가지와 둥치가 부럽겠지만 그들은 때가 되면 깨끗이 떨어져 후세들의 씨앗이 되고 뭇 생명을 살려내는 열매들이 오히려 부러울 게다. 남아있는 그들은 늦가을 외로움을 견디고 살갗이 터질 듯한 추운 겨울을 참아내야 한다. 그 일이 더 힘겨울 것 같기도 하다.

투둑, 툭 떨어지는 열매들이 혹시 살구, 살구를 외치며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이 죽으므로 끝이 아니라 벌레들을 살리고 세균에게 먹혀 또 다른 풀과 나무에 영양이 됨을 알고 있을까. 떨어진 살구들을 보며 생명에의 외경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 ‘내가 죽으니 당신들은 살라는 노랗고 붉은 살구들의 외침을 지나는 이들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해마다 반복되는 계절의 향연 속에 여름이 깊어간다. 얼마 가지 않아 살구나무 우거진 잎에 숨어 매미들 울음이 쏟아져 내릴 게다. 벌써부터 내 귀는 쓰름쓰르 쓰르르르”, 그들의 합창으로 가득하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 생각에 온몸이 나른해 진다.

땅을 향해 곤두박질하며 그들이 내는 살구, 살구소리를 상상하니 느슨해지던 내 삶에 강력한 자극이 더해진다. 나도 이 땅에 마르고 닳도록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뭔가 주변에 유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지, 가능하면 생명을 살리고 그 존귀함을 알려주는 일을 해야지. 스스로 산책길의 열매들처럼 붉고 노랗게 될 세월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나는 죽어도, 그대는 살라는 무언의 외침을 꼭 말이나 글이 아니라도 표정으로 손짓으로 만나는 이들뿐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전해 줄 수 있기를 원한다. 땅위를 뒹굴며 지나는 이들의 발에 채이고 밟히는 살구들이여, 생의 목적을 이룬 승리자들로 당당해도 좋다. 하늘이 부여한 마지막 순간까지 누리는 그 모습이 나는 부럽다. 나도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살고 싶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 소리치며 길 위로 낙하하는 그 소리가 듣고 싶다. ‘땅으로, 풀숲으로 생명을 살리러 떠나자, 나는 살구다.’

따가운 햇살과 쏟아지는 장대비, 검은 구름들을 몰고 오는 한여름을 향해 계절은 오늘도 성큼 성큼 발걸음을 내딛고, 산책로에는 생의 종착역에 도착한 붉고 누런 살구들이 나른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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