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논어에세이 빈빈(彬彬)

변두리1 2020. 5. 11. 15:37

논어에세이 빈빈(彬彬)

 

글쓴이는 도서관에서 논어강독을 20여년 가까이 하고 있다고 한다. 40대 초반 여성이 하기에 버거움도 있었을 텐데 대단하다.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70이 넘은 노인이 할 것 같은 선입견을 깨고 책속에 갇힌 논어가 아니라 삶에서 자신이 깨우치는 것들을 나누고 있음이 신선하다. 책날개의 필자 사진에 여성다움이 묻어난다. 많이 먹어도 살찌지 않아 대문보기 민망하다고 시모는 늘 말했단다. 조금 비싼 걸 먹으면 탈이 나 평범한 것들을 즐기나 보다.

수필의 지평을 넓히는데 힘이 될 듯하다. 수필이 늘 신변잡기에 머물고 과거 지향적인데다 특정 주제마저 없어 독자들이 선택을 주저하는데 잘 알려진 주제가 있어 그 거울에 비추어 사물과 삶을 보면 새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필의 폭이 분명하고 넓어지면 좋겠다. 역사수필, 생태수필, 유머수필, 언어탐구수필, 종교수필, 무한한 영역으로 확대되어 딱딱한 주제들을 신선하고 유연하게 이성과 합리의 견고함을 비틀고 달빛 같고 때로는 섬광 같은 깨우침과 영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질이 문을 이기면 촌스럽고[質勝文則 野], 문이 질을 이기면 사하니[文勝質則 史] 문과 질이 적당히 배합된 뒤에야 군자다[文質彬彬然後 君子]. 글에도 내용과 표현이 조화를 이루고 글과 인격이 함께 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음[人不知不慍]이 쉽지 않은 경지다. 다음 학기 폐강이 결정된 마지막 수업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아무리 만나면 헤어지는 것[會者定離]이 이치라 해도 헤어짐은 고통이다. 이 시대에 옛 사람들의 삶의 철학, 논어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해도 자본주의의 속성을 따라 선택받지 못하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서운함이다. 다행이 수강생들의 호소로 강의가 이어졌다고 하니 행복한 결말이다.

친정아버지 차를 몰라보고 흠집을 냈다며 공자가 말하는 정직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정직인가다. 공자는 아버지가 자식의 잘못을, 자식이 부모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바르다고 한다. 여기에서 내부 고발자 얘기가 언뜻 비치지만 인륜을 거슬리지 않는 것이 바른 행실일 게다. 더 큰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인륜이 무너지면 무엇이 남는가. 평등한 사회에서 거대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내부 고발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공부가 누구에게 즐거울까.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한 때는 밥 먹는 것도 잊고 말 그대로 식음을 폐하고 하던 일도 어느 순간에는 시들해지고 힘겨워진다. 그 순간 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붓지 않아 산을 이루지 못한다[爲山 未成一簣 止]는 글귀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비슷한 말들을 자주 듣는다. 땅을 칠 일이다.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다 겪고 마지막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해 큰일을 이루지 못하는 게다.

군부대에 도서관을 만들고 책을 대여하는 일을 하는 모습에서 어머니다움이 묻어난다. 아무 것도 부족할 게 없어 보이고 고민도 하나 없이 멋있어만 보이는 그들에게 사실은 말 못할 걱정과 문제들이 쌓여있다. 그들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삶 자체가 문제의 연속이어서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얽히는 인간관계가 있으니 죽기 전에는 항상 문제가 있는 게다. 문제들은 내가 먹고 성장해야 할 주식인지도 모른다. 책 속에 글 한 줄이 솟아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철한 이성을 되찾아 줄 수 있다.

글쓴이의 아들 둘이 미친 듯이, 고집을 꺾지 않고 사는가 보다. 공자가 중행의 선비를 얻어 함께 할 수 없다면, 반드시 미친 사람이나 고집 센 사람과 더불어 할 것이라’[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고 했단다. 미친 사람은 뜻이 높고 진취적이고 고집 센 사람은 단순하고 하기 싫은 건 결코 안 한단다. 내 주변에 이런 미친 이와 고집쟁이들이 많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자식들과 독립하는 것이 어렵다.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갈수록 서로에게 짐이 되고 사이가 멀어질 수 있다. 어미의 태중에서는 탯줄로 이어져 한 몸이지만 출생과 함께 둘이다. 사춘기를 지나며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취직이나 군대로 마지막으론 결혼으로 서로 심리적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이것이 잘 되지 않은 채로 서로 소유하려하고 빼앗긴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시한폭탄처럼 위태롭다. 혈연이 같이 만나는 게 즐겁기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상태가 된다.

서구적 교육과 사상이 좋은 점도 많다. 수평적 인간관계와 민주적 의사결정 얼마나 멋이 있는가. 고루하고 시대에 뒤진 것 같지만 동양의 고전에서 오늘의 현대인들이 취할 것도 적지 않다. 수천 년의 검증을 거치고 살아남은 지혜들이 아닌가. 사람은 환경이 바뀐 것이지 사상과 감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공자가 이 땅에 나타나 삶의 지혜들을 펼쳐 놓은 것은 현대인에게 커다란 은총이다.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넓고 긴 도로를 하나 선물해 준 셈이다. 마지막 안전판을 소유하고 있는 게다.

동양의 한 나라, 교육과 문화가 앞선 동방예의지국에 살면서 논어를 원문으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읽는다고 깊은 뜻을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 책의 내용을 말하고 기록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제까지도 읽지 못한 것 생전에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무거운 짐을 벗듯 한번은 해보고 싶다. 글쓴이 같은 이들이 많아지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좀 더 수월하게 이뤄볼 수 있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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