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나비와 엉겅퀴

변두리1 2020. 4. 23. 05:53

나비와 엉겅퀴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장편소설이다. 희련이란 여인을 중심으로 많은 인물들이 얽혀있다. 그녀의 전 남편이자 그녀를 잊지 못해 주변을 맴도는 자존심 센 무명화가 장기수, 근거 없는 돈의 힘을 과신하고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최일석, 선배 언니의 오빠이며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감정적으로 가까워지나 자신 없이 주저하는 강은식, 긴 세월 친한 벗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는 은애,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사람들을 대하는 젊고 아름다운 악마 송인숙, 자신의 불행을 부정적 자산으로 피해의식을 동생에게 퍼붓는 언니 희정, 아내와 애인을 구분하며 양쪽을 오가는 은애의 남편 정양구와 그의 연인으로 살았던 현재밖에 없는 것 같은 남미, 삶은 모순투성이라는 것인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아내기 어려운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에 보이는 나비와 엉겅퀴는 무엇의 상징일까. 나비가 꽃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니 남성들 같다가도 연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희련과 남미라는 생각이 든다. 척박한 환경에서 들풀처럼 사는 이들이 엉겅퀴 아닌가 하다가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끝까지 살아남는 이들이 엉겅퀴 같기도 하다.

희련의 기업은 수제 여성복 제작이다. 이혼 경력이 있고 전 남편이 가까이에 있지만 남성들의 환심을 산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인지 인간적 흡인력인지 남성들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스스로 적극 나서도 드러나지 않는 이가 있는가하면 조용히 한쪽 모퉁이에 있어도 향기가 나고 도드라져 보이는 이가 있다. 희련도 언니 희정에게 자주 공격을 받는다. 별 것 아닌 일로 때론 오해로, 언니의 열등감 때문에 퍼붓는 언어와 감정의 폭력을 겪는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이 정양구와 남미다. 정양구의 아내 은애의 옛 애인이 한현설이다. 양구는 은애와 한현설이 늘 신경에 거슬린다. 제 행동이 그러하니 생각하는 것이 그 수준이지 할 수도 있다. 그에게 가정과 아내는 생활의 토대요 바닥과 같아 그것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건실하나 밋밋한 아내와 짜릿한 활력을 주는 애인 사이를 오가며 죄책감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물론 남미와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것은 은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편의 다른 여인을 눈치 채고 있지만 가정을 깨고 싶은 생각도, 남편과 한판 하려는 의도도 없다.

답답하기는 남미도 다르지 않다. 미래도 희망도 없는 관계임을 알지만 단절하지 못한다. 양구가 찾아오면 함께 밤을 보내고 도움을 받으며 생각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 남미가 양구에게 외국인 남자와 함께 바닷가에 다녀와도 되냐고 묻는다. 양구는 순간 당황하지만 자신이 남미를 책임질 것이 아니니 묵인한다. 남미는 로웰과 휴가를 갔다 와 서로 연락 없이 한동안의 세월이 흐른 후 로웰과 결혼계획을 털어놓고 헤어질 것을 선언한다. 잊고 있던 양구에게 계획이 어그러진 남미가 어느 날 다시 나타나고 그녀의 거처를 다시 찾은 그는 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심한다. 아내 은애가 유전적 정신병에 어려움을 겪는데 남미가 그러면 자신이 양구의 아내가 될 수 있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은애의 병이 깊어지면서 양구는 아내를 돌보는 남편의 역할에 충실하고 은애의 오빠인 은식은 조국을 찾아 희련과의 사랑에 빠져든다.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돈으로 보상받으려는 희정의 욕심이 오히려 화가 되어 인숙과 일석 김 마담에 의해 빚이 불어나고 집문서를 빼앗기게 된다. 최일석은 돈을 매개로 희련을 차지하려하고 그 일에 인숙이 한패가 되고 돈관계가 얽힌 어니 희정도 그들을 편들고 나선다.

은애를 매개로 하여 그녀가 요양 중인 갑사 주변에서 사랑을 키워가던 은식과 희련은 마음과 감정은 같으나 주저하고 둘 다 지신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위축된다. 그들의 관계를 깨뜨리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는 인숙과 일석, 게다가 장기수까지 나서 은식과 희련의 오해를 부추긴다. 희련은 시골로 내려가고 은식은 많은 노력을 하지만 희련을 만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은애가 건강을 추스르고 봄과 함께 희련이 돌아와 살던 집을 처분해 빚을 정리하려 한다. 자신의 단골에게 집을 팔고 옮겨갈 집을 은애에게 부탁한다. 은애는 집을 알아보다가 남편의 연인인 남미가 살았던 집을 소개받는다. 자주 찾던 남자가 발길을 뚝 끊자 젊은 여인이 암이 나타나 별다른 짐도 없이 집을 비우고 이사 갔다는 말에 께름칙해 있던 차에 이사 간 여인을 찾아 나타난 남자 목소리가 귀에 익숙하다. 부부는 그렇게 이상한 곳에서 어색하게 만난다.

이사를 앞두고 은애는 자살을 하고 또 다른 곳에서 남미도 음독으로 세상을 등진다. 은애는 남편에게 희련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음모와 압박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슬쩍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 여성의 위치가 보이기도 한다. 크게 보아 피해자는 여성, 가해자는 남성이다. 죽음을 택한 이들이 여성들이다. 상대적으로 악하게 묘사된 인숙과 기수가 다정하게 길거리를 걷다 양구와 마주친다. 머지않아 청첩장을 보낼 거라는 그들이 양구에게는 익숙한 듯 낯설고 연인인 듯 타인인 듯 보인다. 하기는 이 땅에 오래 사는 게 행복인지 저 세상에 빨리 가는 게 더 나은 것인지도 판단이 쉽게 서지 않는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냥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비도 엉겅퀴도 생긴 그대로 얼마간 지상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그저 그런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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