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를 읽고
정신과 의사 양창순 박사가 썼다. 이 세상을 서로 잘 살기위해 까칠한 삶이 필요한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상대의 눈치를 보며 상대에게 거슬리지 않게 살려 한다. 주변인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해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해도 내색하지 않고 참고 산다. 몇 명이 회의를 해도 서로 눈치를 보고 결정이 난 후에는 자신이 원한 것은 따로 있다고 한다. 결국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안건이 관철되면 손해 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살지 말자는 거다. 남들은 내 생각만큼 내게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단다. 간단히 추측해보라.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그토록 마음을 쓰고 있는지. 다른 이들도 큰 차이가 없을 게다. 내가 내린 결정과 그 일의 결과에 남들이 나만큼 책임을 져 줄까. 그렇지 않다. 충고해 준다고 해야 그들이 알고 있는 범위에서 객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으면 내가 분명하게 알 방법이 없다. 그저 평소의 모습에 비추어 짐작할 뿐이다. 주변을 살펴서 자신의 진심을 감추고 견해를 밝힌다면 남들이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나중에는 자신은 양보하고 배려했다고 여기지만 주변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게다.
생활정보지에 이런 광고가 실린다고 가정해보자. “매매, 복대2동 복대아파트, 32평, 방 셋, 도시가스, 15층 중 7층, 1억8천 절충 없음” 이 내용에 주변의 눈치를 본 애매한 구석이 있을까. 가격 면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그 외에는 분명하다. 이렇게 상대의 의사가 분명할 때 매수를 원하는 이들도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게다.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상대를 배려해서 의견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해석에 따라 허락과 거절이 달라진다면 오해의 여지가 클 수밖에 없다.
자신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까칠해 보이는 거라면 모두 까칠하게 살면 좋겠다. 우리 문화가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고 타인의 의견에 분명한 반대를 하기를 꺼린다. 더구나 위, 아래를 따지고 네 편 내 편을 가린다면 더 말할 것이 없다. 게다가 혈연 학연 지연을 내세우면 최선의 결론을 내자는 것이 아니라 패거리를 짓자는 것일 뿐이다. 그런 문화라면 의견을 모으는 건 의미가 없다. 집단의 우두머리 생각이 항상 결론이고 그에 반대하면 버릇이 없는 게고 의리를 모르는 셈이다. 그런 무리 속에서는 두목의 눈치와 기분을 살펴 비위를 잘 맞추는 게 살아남는 비결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적이지도 않고 일정 규모이상 확대될 수 없다. 적어도 다수가 만족할만한 결론을 얻기 어렵다.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합리적인 결론을 찾자는 데도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자기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은 대단해보이고 자기는 하찮아 보여서다. 관점을 조그만 바꾸면 그게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보편적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은 게다.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하다고 해야 객관적이다.
대단함과 하찮음의 차이가 무엇인가. 장점과 단점, 우월함과 열등함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장점만 있고 단점이 없는 이도 없고 단점만 있고 장점이 하나도 없는 이도 없다. 남의 밥그릇 콩이 커 보이는 법이다.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남들은 잘 갖춘 모습만 보이고 자신에 대해서는 꾸미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니 그런지도 모른다. 정장에 단정히 머리를 손질한 타인과 허름한 옷에 부스스한 자신이 겹쳐 보이는 건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키가 큰 사람을 부러워하고 큰 키가 작은 키에 비해 우월한 갓이라고 여긴다. 키에 대해 개인이 좌우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될까. 키가 크고 작은 것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작은 키 사람들이 아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일정 범위를 벗어난 큰 키의 사람들도 삶에 큰 불편을 호소한다. 키가 작은이들은 남들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아 다른 이들이 큰 경계심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관계에 유리한 면이 적지 않다는 게다. 그 사람만의 특징이 될 수도 있어서 다른 이들이 잘 기억하는 자산일 수도 있다.
아들러는 모든 이들이 모든 면에서 열등한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가. 거의 완벽한 무능에서 출발하는 게다. 이동 인지 의사표현 그밖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출발한다. 제 몸도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음식을 섭취할 이빨도 없고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한다. 잘난 척 하는 이가 있다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게다.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히고 허락과 거절을 분명히 할 일이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자신을 선명하게 보여주면 남들도 편하게 결정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관계에서 서로 편안하고 갈등의 소지를 줄이는 방법이다.
까칠하게 산다는 게 서로 피해의식을 느끼지 않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살자는 것 아닐까. 길게 보면 모두에게 피곤하지 않은 삶이고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길이지 싶다. 자신을 자신 있게 드러내자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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