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가출하고 싶다
김희곤, 건축에 웬만한 관심을 가진 이들은 알만한 이름이다. 하는 일도 많고 책도 여러 권 냈다. 건축사무소도 가지고 있고 홍익대 대학원을 거쳐 스페인 유학을 다녀왔다.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강의를 한다. 아들, 딸을 자랑할 만큼 키운 것 같다. 어려움을 많이 겪은 것 같지만 평범한 이들이 볼 때는 부러울 뿐이다. 자녀들과 살아가면서 기록한 사연들도 고충을 호소했다고 말하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글쓴이의 의도는 힘들었고 어려웠음을 표현해 보고자 했겠지만 엄살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국에서 그 정도 하고 살면 상류층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도 자신의 삶에 완전히 만족할 수 없고 자녀들에게 부족 없이 해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게다. 때로는 학벌에 대한 지은이의 집착이 거슬리기도 한다. 우리 현실에서 대학이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게 다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다. 대학이 정해진 후의 삶은 부수적이란 말인가. 1퍼센트의 승자와 99퍼센트의 패자가 어찌 의미가 있는가. 승자조차도 만족하지 못하고 쫓기듯 불안한 삶을 사는 게 솔직한 현실 아닌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행복을 계속 미뤄 삶에 지극히 짧은 순간 행복을 누렸다 한다면 그 삶이 행복했다 할 수 있을까. 행복은 미룬다고 확보되는 게 아니다. 그때그때 삶의 각 단계에서 맛보고 누리며 사는 게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다. 남의 기준에 맞추려니 행복을 누리기 어려운 게다. 남들이 알아주는 곳이 좋은 대학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데가 행복한 대학이다. 타인에게 맞춘 삶을 살려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 일이다.
지은이는 가우디에게 배울 점이 철저히 자신의 길을 갔다는 것이라 했다. 휩쓸려 사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는 게다. 모두가 앉아서 설계를 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관절염이 있으면 서서 한들 잘못될 게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직선으로 설계를 하고 건축재를 사용해 짓는다 해도 자신의 신념이 곡선이면 곡선으로 가볼 일이다. 가우디의 신념과 성실성이 바르셀로나를 가우디의 도시로 만들었다. 건축학교에서 교수들도 동료도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실세계에서 구엘을 만났고 그의 건축을 꽃피울 수 있었다.
외환위기에 스페인 유학을 실행할 수 있음이 지은이의 위치를 말해주는 건 아닐까. 숱한 어려움이 있었을 게고, 나이 마흔다섯에 익숙지 않은 언어로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만한 이들은 모두 알게다. 하지만 한 꺼풀 뒤집어보면 그 만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온 몸으로 난관을 뚫고 갈 수밖에 없다. 그 위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삶이 비참해지고 세상을 등지기도 했던가. 그 위기는 많은 이들에게 여러 의미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자녀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는 약해지고 자녀들은 강해져 온다. 자녀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한 편은 자랑스럽고 든든하면서도 한편 자신이 시들어 가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만만하지 않다. 겨우 경제적인 면을 제외하면 자녀들에게 우위를 내세울만한 걸 찾기 힘들어진다. 나 같은 부류의 존재들은 자녀들에 비해 경제적 우위를 점했던 시기가 없었으니 이 시기를 지나면서 완전한 역전이 이루어진다.
자기 자녀를 바라볼 때 불안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어려보이고 약한 듯하고 실수할 것만 같아 불안하다.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떨까. 내 부모님도 오늘의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게다. 거꾸로 당시의 나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자신감, 대학의 교수들이 부추기기도 했을 게고, 주변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시시하기도 했다. 내가 하면 그들보다 훨씬 잘 할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약하다는 걸 드러낼 때다. 이제 권위주의 시대는 갔다. 어깨에 힘주고 근엄한 표정을 지어도 누구도 겁먹지 않는다. 자신만 끝없이 피곤할 뿐이다. 지은이가 세운 세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아내에게 절대 말대꾸하지 않고,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가사 일에 소리 없이 협조하는 게다. 가정의 주도권이 아내에게 완전히 넘어가 있음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 체제에서 현명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 한 표현이 엄살떨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강함을 내세워 가족들의 복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약함을 내보여 연민을 자아내고 도움을 받는 게다.
그런 문맥에서 콩 심은 데 팥 나고 팥 심은 데 콩 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나는 바담 풍해도 너희는 바람 풍하라’는 게다. 내 보기에는 글쓴이 정도 한다면 자녀들에게 물어봐도 훌륭한 아버지요 닮고 싶은 아버지라 할 듯하다. 이 땅에서 분명한 직함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크게 구김살 없이 자신의 목소리 내며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의 삶과 비교할 게 아니라 가우디처럼 내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 위축을 느끼며 살아갈 게 아니라 당당하게 살 일이다. 어느 누구와도 다른 유일한 존재가 나이니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할 일이다. 스스로의 잣대를 만들고 맞추어 살아보고 싶다. 내가 만드는 내 기준이니 물론 내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할 일이다. 아무리 봐도 그는 대놓고 엄살을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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