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넘어 미래를 열다
-중재 장충식 회고록-
한 사람의 삶이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겠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얽히고설켜 개인사와 사회사가 이루어진다. 사회가 선인과 악인이 섞여있고 때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기도 해 복잡하다. 본인이 저술한 회고록이 객관성을 온전히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감안하고 큰 줄거리만 보더라도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책이 무려 650여 쪽이니 쓰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그가 영향을 끼친 것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근본적으로 그는 대학인이라 불러야 하겠다. ‘단군의 대학’이라는 의미가 있는 단국대를 설립한 그의 아버지 ‘범정 장형’은 독립 운동가였단다. 5⦁16 군사정변을 맞으며 위기에 처한 대학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애처롭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대학 편에 서주리라 예상했던 동문들과 교수 이사들이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라 행동하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심한 말인지 모르나 그것이 인간 본성이 아닐까. 저들도 대의명분과 개인적 이익을 두고 이해와 우선순위를 따지지 않았을까. 그는 주간부가 폐지된 단국대의 학장이 되어서 정원을 늘리고 종합대승격을 이루어낸다. 그를 비난할 의도는 없다. 그는 철저하게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혈연 지연 학연과 지인들의 인간관계를 활용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난제를 하나씩 해결해 간다. 그 사이사이에 인간관계로 인한 만만찮은 문제들이 돌출한다.
천안에 대학 분교를 세우고 꼬인 부동산문제를 처리한다. 마침내 죽전캠퍼스를 완성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사이에 치과대와 치과병원을 세우고 또 의과대와 병원을 개원한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에는 충남 청양을 기반으로 하는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 살리기의 좋은 본을 보였다지만 한편에서 어용으로 적지 않은 지탄을 받았음직하다. 그는 단국대 총장으로 꽤 많은 외국 대학과 자매 결연을 맺고, 스포츠 외교에 영향력 있는 이들에게 명예박사학위를 많이도 수여했다. 그의 삶과 단국대는 정권과 장관의 호불호에 따라 순풍과 역풍을 겪었다.
체육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간과할 수 없다. 그 자신이 학창시절에 핸드볼과 럭비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고 최연소총장이 된 후로는 숱한 대학연맹 종목의 회장을 역임한다. 그런 활동을 기반으로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유니버시아드대회 단장을 네 번 연속 맡았다.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협상대표로 수차례 참여하고 축구와 탁구의 단일팀을 구성해 좋은 성적까지 거둔다. 서울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도 미수교 상태였던 나라들과 중동아시아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겨울 스포츠의 육성과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스포츠를 매개로 국익에 부합하는 외교활동에 일익을 담당했음을 인정받고도 남음이 있다. 체육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능히 국제적 거인이라 할 만하다. 대단하다.
민족문화를 기리기 위한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석주선박사로부터 조선시대 민속 문화재 4,000점을 기증받아 석주선기념 민속박물관을 건립하고 석주선박사의 활동을 지원하여 민속 문화를 보존했다. 상해와 중경의 임시정부 구청사를 대기업의 후원으로 새롭게 복원하여, 한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만들어 수익이 창출되는 구조로 만들어 해당 자치단체가 운영하게 했다. 또한 일석 이희승 박사를 초청해 동양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를 거듭해 25년 만에 『한국한자어사전』 전 4권을 완간한다.
그의 생애의 한 부분은 학자로서의 삶이다. 그 분주한 생활 중에도 고려대에서 동양사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총장직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또한 몇 권의 전문서적과 여러 권의 수필집을 발간했다. 집념어린 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한한대사전』출간이다.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인력과 재력이 필요한 거대한 작업인 그 일을 단국대학교를 기반으로 동양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온갖 오해와 어려움을 헤치고 시작한지 31년 만에 동원 인원 22만 명, 예산 350억원을 투입하여 16권에 이르는 방대한 작업을 완성한 것이다. 관계된 모든 이들의 수고와 노력의 결실이지만 특별히 중재 장충식의 집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여러 일을 하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인간이란 어떤 동물인가를 수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강요하지도 않고 언질을 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충성을 다짐하던 이들이 별 것 아닌 일에 돌아서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이 되고 어려운 때에 그가 도와줬던 이들이 얼굴을 바꾼다. 완전히 바닥인생에서 그의 도움으로 사회상류층이 된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예 생활의 순간순간에 남의 비리를 조사하고 모아서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그것으로 물고 늘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아무런 인연과 이해득실 없이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이들도 있었다. 개인이 누리는 사람 복이라고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람은 능력을 타고 나는 것 같다. 많은 일을 한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자신만 잘한다고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많든 적든, 크든 작든, 내게 주어진 일들을 성심껏 해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는 참 많은 일들을 했다. 대표로 있던 기관과 직책도 무수하다. 이 땅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마치 마을 입구의 큰 나무를 연상케 한다. 큰 나무가 소중하지만 동산과 뒤뜰에는 이름 모를 작은 풀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도 여전히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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