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내 안의 깊은 계단

변두리1 2019. 9. 16. 08:48

내 안의 깊은 계단

 

  유물을 발굴하는 이들 이야기가 소설화되어 있어 흥미롭다. 유물을 발굴하는 강주와 그와 결혼한 이진, 연극을 공부하고 공연을 올리는 강희와 그 여자 친구 독일 여성 마리나, 도서관 사서 소정과 약간은 어긋나는 듯한 남편 상훈으로 골격이 짜인다. 강주는 큰 집의 장남이고 강희는 강주의 작은 아버지 첩의 아들이다. 소정은 강희의 동생으로 강주보다 나이가 많다.

  이들은 결혼한 부부는 하나같이 주말 부부 같다. 소정의 남편은 울산으로 발령이 나 그곳에서 생활하고 소정은 서울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강주는 경주에서 발굴을 하고 이진은 서울에서 아이들 바이올린 지도를 하고 시향에서도 연주를 한다.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강희는 여자 친구 마리나가 있지만 결혼 상대는 아니다.

  이들의 관계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미혼인 강희의 여자 친구인 마리나가 강희를 찾아 내한해 동거하지만 다른 여인과 함께 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연극 연습과정에서 알게 되는 여인들과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강희와 강주가 같이 동승해 가다가 차선진입을 잘못해 커다란 교통사고가 나고 강주가 죽는다. 강주의 죽음으로 강희의 연극에서 바이올린으로 음악을 맡았던 강희와 삶이 연결되고 그의 아내가 된다. 이진은 강주의 아이를 낳고 강희의 아이는 낳지 않기로 결심한다.

  소정은 사서로 일하는데 상훈과의 사이가 별로 좋은 편이 아니다. 상훈에게 다른 여인이 있는 것 같고, 소정에게 다가서는 남자들이 있지만 가까이 하지 않는다. 휴가를 맞아 구체적 계획이 없던 소정은 중국에서 열리는 도서관 사서 세미나에 참여하기로 한다. 소정은 중국에서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에 매력을 느낀다. 창사에 있는 마왕퇴의 유적을 보려하는데 언어와 안전 문제에 걱정이 많다. 그런 소정 앞에 나타난 이가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일본 청년, 후지이 다까히로다. 그가 언어와 안전을 깨끗이 해결해준다. 더욱이 창사까지 동행해 짐을 나누어지고 외로움을 덜어준다. 소정은 그의 따듯한 마음과 배려에 스스로 가까워지고 특별한 사람이 된다.

  강주는 유물발굴을 하면서 역사를 생각하고 오래 전에 이 땅에 살던 이들과 그들의 유물을 대하면서 죽음과 익숙해졌을 것이다. 죽음은 어쩌면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게 아닐까. 강주는 불과 이삼 분 전에도 죽음의 그림자를 보거나 느낄 수 없었고, 강희는 간발의 차로 죽음이 빗겨갔을 뿐이다. 삶에서 죽음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언젠가 반드시 맞이할 일이라면 서둘러 한 번은 진지하게 준비해 두는 게 현명하다. 준비 없이 당하는 일은 당황스럽고 제대로 대응하기도 어렵다. 삶의 통과의례처럼 중요한 순간마다 그들을 찾아가 만나고 대화하면 좀 더 다정하고 친숙하게 덜 황망하게 맞이할 수 있으리라.

  그들 서로 간에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 조금은 낯설지만 합리적인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조선중기는 아니다. 삶의 문화가 달라지면서 풍속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어떤 나라는 유부녀 교사와 결혼한 남학생 제자가 대통령이 되고 그 나이 차이를 넘어서 잘 살고 있다. 우리도 최근에 여교사가 15세 제자와 성관계를 가져 문제가 됐지만 사법기관에서는 무혐의 판정이 났다. 교육당국에서 중징계를 할 모양인데 십여 년 전만해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우리 사회가 여러 분야에서 경직성을 벗었으면 좋겠다. 담을 헐자는 게 아니라 힘겨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적은 여지를 남겨 두자는 것이다. 강주의 부인을 강희가 맞이해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서 간단치 않은 일이다. 친인척들이 다 알고 있는 사촌동생의 부인이다. 예외가 일상이 되어서는 곤란하지만 높고 견고한 담이 늘 바람직하지는 않다.

  소정은 상훈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한국을 찾은 후지이 다까히로를 만나지 않고 호주로 이민을 간다. 새로운 미지의 나라에서 또 다른 시작을 꿈꾸는 것이리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왜 비밀의 계단이 없으랴. 모두가 단란하고 평탄하며 행복해 보여도 문을 열고 깊은 속을 들여다 보면 숱한 사연들이 깊은 옷장 속에 고이 개켜진 옷들처럼 쌓여 있을 게다.

  일부러 휘저어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하거나 비밀들을 들추어 낼 게 아니라 가라앉은 흙물을 정수해 사용하듯 파문을 일으키지 말고 평화를 유지할 일이다.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고속철이 통과하는 걸 보는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징후일 게다. 지식습득의 방법과 문화가 읽기에서 보기로 옮겨가면서 활자에서 화면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20세기를 넘기면서 인류는 항상 과도기를 겪고 있다. 산업과 문화와 생활의 과도기에 중간층이 행동하기 어렵다. 노년층은 사회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급속한 퇴조를 느끼고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사회의 구조가 뒤집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회는 구성원들의 불평과 탄식에 아무런 대꾸 없이 가속을 붙이며 전진해 간다. 그 그늘 어두운 곳에서 서글픈 눈물도 쌓여가고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들이 생떼 같은 목숨을 거두어 가기도 하면서 남은 이들은 그들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화가들과 시인들은 변화의 풍향을 민감하게 읽고 소설가들은 변모의 모습을 그려내고 철학자들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가슴 깊은 곳에 장편 소설 한 권 분량의 사연이 없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보면 모두가 자신 안에 깊은 계단을 품고 산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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