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소설을 읽으면 그 작가들이 대단하게 여겨진다. 작가 전경린에게도 같은 놀라움을 느낀다.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왔는데 나는 도외시한 문제를 그녀는 어떻게 파고들 수 있었을까. 가만 돌아보면 내가 문제였음에 분명하다. 우리 역사는 막다른 정치발전의 벽에서 학생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196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많은 일들을 이루어냈다. 그 과정에서 개인과 학교, 국가가 입은 부정적인 상처들도 적지 않았을 게다.
이제 시위문화는 대통령탄핵을 계기로 획기적 변모를 맞이했다. 온 국민의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축제가 되었고 위험부담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는 1980년대의 시대상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을 게다. 정치와 노동에 있어 민주화를 요구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겪었던 인간의 근본적인 사랑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인물은‘이나’로 서른 살이 된 운동권 사내‘태인’의 아들 진후와 둘째를 임신했다 유산한 잡지사 기자다. 이나와 태인은 아버지가 없다. 이나의 모친은 개가를 해 새살림을 차렸고 태인의 모친은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태인의 담임교사와의 관계가 지역사회에 알려지고 태인의 여동생 혜원이 태어난다. 태인은 모친을 수용하지 못하고 모친은 태인에게 지극한 모성을 보인다. 태인의 모친이 하숙을 치는데 이나가 여고생으로 그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나와 태인은 고1과 고3의 신분으로 처음 대면한다. 태인은 건축사의 꿈을 가지고 대학에 진학하며 집을 떠나고 몇 년이 지나 대학에서 이나와 태인은 다시 만난다. 노동운동에 참여하던 태인은 이나에게 진후를 두고도 가정에 매일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는 노동현장에서 따르던 정수가 찾아와 함께 머무는 이상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나가 출근하는 문창문화사에는 사장 겸 부장 정서현이 있다. 그는 소설가지만 현재 소설을 쓰고 있지는 않다. 그와 가문에서 자손을 원했지만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고 부인은 그 부담이 컸다. 그녀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정서현은 성적 능력을 상실하고 매사에 의욕을 잃었다. 여러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성의 능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처음 이나를 보던 순간부터 성적 욕구를 느낀다. 경제력이 탄탄한 그는 어떻게 하든 이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 한다.
이나에게 태인은 운명적이다. 태인은 이나를 가끔 찾아오고 그로인해 이나는 태인의 둘째 아이를 갖는다. 진후도 자신이 아닌 시어머니가 돌보고 있고 태인의 태도마저 종잡을 수 없어 이나는 아이를 지우려한다. 하루하루를 미루다 찾은 병원에서는 시일이 촉박함을 알게 되고 수술날짜를 잡는다. 이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말리지만 번복하지는 않는다. 이나에게 계속 관심을 가진 정서현은 이나 주변을 맴돌다 길에서 쓰러지는 이나를 도와준다. 수술을 만류하는 정서현의 권고대로 이나는 아이를 나으려하나 자연유산을 맞는다.
유산으로 인한 위기에서 도움을 받고 이나는 건강의 회복을 위해 정서현의 집으로 들어가 생활한다. 얽히고설킨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이나에게 아들을 둔 태인은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정수와 같은 방을 쓰고 이나는 직장 상사였던 정서현의 가정에 머물고 있다.
태인의 삶도 복잡하기만 하다. 노동운동은 성공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만난 정수는 같은 방에 머물고 이나에게는 아들이 있다. 노동운동을 함께 하던 후배 근영은 연탄가스중독으로 생명을 잃는다. 그는 이나를 떠나있는 동안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를 절감하지만 다시 돌아온 후로 정서현의 집에 머무는 이나를 찾지 못한다.
정서현의 집에 머무는 이나는 그의 사정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준 그에게 원하는 바를 묻자 자신에게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나뿐임을 고백하고 육체관계를 요구한다. 여름휴가기간을 묻고는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한다. 자신이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안 이나는 정서현의 별장이 있는 섬으로 열흘간의 여름휴가를 함께 떠난다. 자신을 허락한 이나는 휴가가 끝나고 다시는 자신을 찾지 말 것을 부탁하고 정서현도 마침내 동의한다.
이나는 친구가 있는 곳에서 단순한 일을 하는 직장을 찾고 글을 다시 쓰기로 작정한다. 긴 세월 잃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삶의 난관들을 겪으며 다시 찾아낸다. 자신이 쓰는 글 속에서 이나는 새벽국도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힘겨운 시대, 힘겨운 나날이었다. 자신에게 부닥쳐온 삶을 피하지 않고 피 흘리며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며 단단해 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항상 호기심이 많고 단순했다. 그 참혹한 혼란의 때에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있었고 그 세상을 느끼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살아왔음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 시대를 따로 살아온 느낌이다.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지 못하고 세월이 나를 지나쳐 간 게다. 시대와 개인적 삶의 한 단면을 간접적이나마 돌아보게 해 준 자각에게 고맙다. 글 속 어디선가 사랑은 파멸이라 했던 구절이 생각나는 건 그걸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인가 보다.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