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여자
성수선의 삶에서 만나는 책이야기 -
해외 영업하는 직장인, 책 읽고 쓰는 이로 알려진 여인이 들려주는 본격적인 책이야기다. 웬만큼 읽어서는 그렇게 이리저리 연결하지 못할 텐데 대단하다. 초등학교 때인지 1등을 해서 할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왜 1등을 했냐고 8등 했으면 좋았겠다고 했단다. 왜 하필이면 8등인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집에서 유학을 갔다가 학교에 남는 건 어떠냐고 했다니 공부를 잘했나보다. 중학교 때엔 단편소설이라고 원고지 80매 정도를 써가지고 선생님께 보였더니 소설가가 되라고 했단다. 일찍부터 작가의 기질이 있었나 보다.
이백(李白)의 장진주(將進酒)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세월은 다시 오지 않고 젊음은 살처럼 지나가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君不見)”의 문구에 정신이 번쩍 났단다. 예전의 권학가(勸學歌)가 떠오른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운데,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을 알린다는 경고를 듣는다. 고등학교 시절이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가 현장에서 은퇴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긴 방학이 반이 넘으면 훌쩍 지나가듯 그렇게 인생이 가나 보다.
우리 사회의 몰개성이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한 때는 직장인들이 너도 나도 골프바람이 불더니 어느 순간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단다. 직장인으로 성공하려면 사회생활에 적응하려면 같은 말들을 한다는데 그러면서 압박감을 느낄 것까지야 있느냐는 거다. 취미는 취미로 그쳐야지 재미와 기분전환을 넘어 직업과 연계시키는 게 못마땅한 거다. 이 시대 우리의 속성이 그렇다. 모두가 다 하는데 혼자만 뒤처지는 것 같으니 불안하다. 잘 생각하면 다 하는 걸 한다고 눈에 띄지는 않는다. 본래의 것을 잘하고 여타의 걸 또 잘하면 좋은데 그게 쉽지 않다. 본래의 것은 시원찮고 여타의 걸 잘하면 주객이 바뀐 게다.
전반적인 걸 대강은 알아야 한다. 왜 미국의 금융위기에 아시아인들이 실직을 하고 어려움을 겪어야 하느냐는 게다. 모르면 불안하다. 서브프라임모기지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알고 당하는 게 훨씬 낫다는 거다. 알면 대처할 길을 찾을 엄두라도 낼 것 아닌가. 직장인들이 눈앞의 현실에 연관된 것 외에는 공부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는 걸 염려한다. 현대가 이리저리 얽혀있는 시대니 관련 없는 게 어디 있을까.
신입사원이었을 때 선배에게 스페인어나 프랑스어 중 어느 걸 배우는 게 나을지 조언을 구했더니 능력은 지금도 충분하니 회사나 그만두지 말고 계속 다니라고 하더란다. 그 때는 서운했는데 세월 지나고 보니 정곡을 찌르는 말이란다. 좋아하는 개그맨이 김병만인데 그의 끝없는 노력이 놀랍단다. 개그콘서트에 어느 순간 등장해서 빠지지 않고 줄곧 출연했다고 한다. 몸으로 하는 그 어려운 연기를 지치지도 않고 해낸다. 그가 만든 유행어가 ‘안 해봤으면 말도 하지 말라’는 거다. 뭔가 확실한 철학이 있는 것 같다. 현대가의 어른이 했다던 ‘한번 해보기는 했나’와 상통하는 느낌이다. 봉투붙이는 달인 출연자가 기억에 남는단다. 오랜 세월 그것만 하니 그렇게 됐다는 게 답일 게다. 싫증과 짜증이 밀려와도 한 번 더 해보고 그 길을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게 달인으로 가는 길이다.
책의 어느 부분에선가 육식에 대해 어조를 높인다.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과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나 보다. 바르셀로나 시장에서 본 양머리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고기를 주는 짐승들이 먹는 사료에 미국에서 생산하는 곡류의 70%, 전 세계 생산량의 ⅓에 해당하는 곡류가 소비된다고 하니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 육류를 위한 동물들 사료를 위해 수백만의 인류는 허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선진 국민들은 육류의 과다소비로 암과 당뇨 같은 질병에 시달린다. 연한 고기를 위해 일찍 죽어야 하는 동물들에게도 못할 일이다.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은 무엇일까. 자기만 아는 이기심이 아닐까 싶다. 방송국 피디와 몇 번 만난 일이 있다고 한다. 그가 명절 연휴에 고향에 가면서 강아지를 맡겼는데 아침 한 번만 주면 되니 어려울 건 없을 거라 하더란다. 강아지에 대한 기본 정보를 알려주었는데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혼자 살면서 집이 너무 썰렁해 강아지를 키우니 낮 동안 강아지는 얼마나 외로울까. 강아지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피부를 너무 긁어 동물병원에 데려 갔더니 피부병이 그토록 심해지도록 방치하는 건 동물학대라고 하더란다. 글쓴이가 놀란 건 적잖은 세월을 길렀을 텐데 강아지의 성별조차 맞지 않더라는 게다. 강아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기위주의 학대였던 게다. 대상을 바꿔보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 중심으로 대하고 살았나를 보게 될 게다.
직장 일이라고 해서 그렇다고 지나치게 비굴해 질 일은 아니다. 자존심마저 다 팽개치고 살 수 는 없다. 상식이 필요하고 지혜가 있어야 한다. 남의 말에 턱없이 휘둘릴 일도 아니고 사생활을 포기할 일은 더욱 아니다. 세월과 함께 일과 인격이 모두 잘 성숙되어야 하니 독서가 필요하다. 독서가 직장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보다 인간적이게 하고 상식과 감정을 살려 주는 역할은 넉넉히 할 수 있을 게다. 열심히 사는 그녀 성수선의 직장인 소설을 읽으라는 조언을 기억하며 사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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