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없다
먼저 미안합니다. 제 눈에 띄어 읽고 느낀 대로 써보려 합니다. 좋은 대학 대학원 나오고, 남들이 선망하는 교수직을 뜻한 바 있어 반납한 후 변산에 들어가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분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습니다. 무엇으로 부딪쳐 보자고 해도 내게 유리한 게 변변히 없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책에서 가끔씩 대한 선생의 사진이 생각납니다. 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지만 얼굴이라면 한번 겨뤄볼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키도 그리 커 보이지 않아 그리 주눅 들지 않아 친근함이 들긴 합니다. 책 내용 어디에도 그분이 가장인 가정이나 자녀에 대한 글이 없습니다. 이게 강점인지 약점인지 모르나 잘만 하면 더 나은 점으로 볼만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스레는 그만하고 책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비닐과 쓰레기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골치 아프고 무책임한 일입니다. 나라 안에 갑자기 여기저기 쓰레기 산이 여러 곳 생겼다고도 하고 사용 않는 공장과 창고를 세내어 쓰레기를 가득 부려놓는다고 합니다. 산과 강과 들 뿐 아니라 어디나 넘쳐나는 쓰레기는 인간의 끝 모르는 욕망을 보여줍니다.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욕망의 확대재생산이 소비를 부추기고 소유를 신분으로 착각하게 합니다. 기계화와 대량생산을 거쳐 수요이상으로 만들어내고 욕망에 대고 소비가 곧 삶의 안락함이요 수준이라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쓰레기가 자원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재화는 부족하고 물건은 비싸던 시절이었지요. 이제 돈은 넘치고 물건 값은 쌉니다. 고쳐 쓰는 것과 새로 사는 게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사용하는 것보다 땅 속 자원을 파내 쓰는 게 생산성과 효율 면에서 낫습니다. 수억 년 동안의 자원 사용보다 최근 몇 십 년이 더 적다고 할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심을 줄이지 않는 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근본 바탕을 다시 이루어내지 않으면 별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교수님은 남들이 하지 않는 주곡농사를 지으면서 그것도 무제초제, 무농약, 무화학비료로 삼무농사를 하려합니다. 좋은 생각이고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대중화는 어렵다고 느낍니다. 현재의 방법으로 변한 근본원인은 농촌인구의 현격한 감소에 있습니다. 인력이 부족하나 농사를 안 할 수는 없으니 차선책을 찾은 거지요. 예전 방식대로 3무 농사를 지으라하면 그나마도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마을 분들이 보기에 노는 것 같고 절실함이 없어 보이는 게 그런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도 그런대로 있는 듯하고 돈도 아쉽지 않은 것 같으니 뭔가 자신들과 다른 이질적 집단으로 비칠 것 같습니다.
시대와 상황이 달라진 21세기에 1960년대식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농촌에 일손이 그래도 있었고 세계정세도 오늘과 달랐던 그 때는 자연스런 방법이었지요. 지금도 농사에 의지해 사는 문명이 우리 1960년대와 비슷한 곳에서 행해지는 영농일 겁니다.
지은이는 때때로 시간을 쪼개 글을 씁니다. 어쩔 수 없는 농사꾼의 삶이 아니라 마치 옛날 양반들이 취미로 여유롭게 농사짓고 글도 쓰는 모양새입니다. 교육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참다운 교육을 하려합니다. 욕심이 과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능력의 차이겠지만 저 같으면 교육에 전심해서 어느 정도 교육이 궤도에 오른 후에 농사로 옮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보일러 대신 구들을 놓고 비닐 끈을 사지 않고 새끼를 꼽니다. 물론 이런 일에 우월의식이 있어서도 안 되고 다른 이들이 하는 방법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해서도 옳지 않습니다. 그곳의 주민들도 주어진 여건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결과가 오늘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들 공동체로선 절실하지만 주민들이 보기엔 있는 이들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상품작물 농사에 대해 빚이 늘어나는 일이라 하고 언론에서 소개하는 귀농성공사례가 바람직하지 못한 농사인 듯 언급합니다. 투기성 영농이 되니 잘못될 경우가 많습니다. 풍작이 되어도 흉작을 만나도 웃기가 어렵지요. 다른 이가 어려움을 당해야 내게 득이 됩니다. 그렇다고 농민들에게 주곡농사를 하라 말할 수 있을까요. 다른 나라에 대한 의심을 줄이고 서로 협업을 함이 나을 수는 없을까요. 어차피 현대의 생활이 한 개인이나 나라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으니 서로 의지하고 살 수밖에요.
책에서 읽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지만 저 같으면 현재의 일거리를 삼분의 일 정도로 줄일 것 같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필요한 건 분명하지만 줄여도 굶어죽지는 않을 겁니다. 규모를 줄이면 하려는 일들이 보다 뚜렷해 질 수 있지 않으려나요. 삼무농사도 더 수월하고 삶의 모습이 한결 여유로워질 수 있겠지요. 할 일을 찾으면 끝이 없지요. 아무리 수평적 관계라 해도 책임감이 같을 수 없지요. 여러모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노동을 요구하고 그에 합당치 않으면 오지 못하게 하기보다 차라리 저라면 일의 규모를 크게 줄이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일정경비를 부담하게 해서 그들과의 대화에 더 무게를 두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공동체를 상설로 두고 방학 때는 특별한 과정을 개설해도 좋겠지요. 공동체에 들어오는 이들이 꼭 같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를 합니다. 가정들이 늘어나고 필요에 따라 “같이 또 따로”의 생활도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많은 이들이 공동체를 시도하고 많이 실패했습니다. 염려스러운 풍문이 들리니 건강에 더욱 조심하시고, 모쪼록 좋은 의도 뜻한 바를 넉넉히 이루시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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