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대농공원 다목적 문화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흐의 미디어아트전을 보았다. 좁은 방 어두운 분위기, 흐릿한 남폿불 아래 다섯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1885년 봄에 그렸다고 하는 가난하고 고단한 삶에 대단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어 보이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고흐는 서른일곱에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10년 남짓 동안 이천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다. 동생 테오에게 그 시절에 쓴 편지가 650여 통 전해지니 그 기간을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흐는 짧은 삶을 힘겹게 살았다. 가족력으로 추측되는 정신병의 발작으로 중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화랑 점원 생활을 시작한다. 평생을 따라 다니며 그의 삶의 방향을 틀었던 운명적 아픔을 뭐라 할 수 있을까. 남의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신념이 분명했던 고흐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해 주변에 목회자가 많아 성직의 길을 가려했으나 실제와 너무 동떨어진 것 같아 신학을 포기하고 선교사의 길을 가려한다. 탄광촌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보고 그들에게 혼신의 열정을 쏟은 것이 오히려 그 일에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어 그 일마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목회지인 뉘넨에서 야심차게 그린 작품, 자신이 성공작이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졌던 게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혹평하고 유일한 후원자인 동생 테오조차 인정해 주지 않았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게다. 어두운 색조와 무거운 느낌들, 크게 기대할 것 없는 미래와 힘겨운 현실이 고흐의 형편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고흐 생전에 팔아본 작품은 딱 한 점이라고 한다. 아를에서 그렸던 〈붉은 포도밭〉, 당시에 400프랑 약 1000달러에 팔렸단다. 고흐의 생활형편을 짐작할 수 있겠다. 수입이라곤 없고 오직 동생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형으로서 자존심도 서지 않고 넉넉히 쓸 수도 없었을 게다. 잘 나가는 화상(畫商)이었던 동생은 얼마나 형의 작품을 팔고 싶었을까. 여러 고객들에게 적잖이 추천하고 거절도 당했을 거다. 그 안타까움을 형에게는 전하지 않았을까. 당시에 잘 팔리는 작품들의 경향과 형이 그린 그림의 차이를 누차 얘기했으리라. 고흐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고흐의 작품이 몇 점 된다. 연작들이 여럿인데 〈자화상〉,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씨 뿌리는 사람〉, 〈지누 부인〉 같은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현재 하나에 수백억을 호가한다. 고흐가 만들어 인류에게 남긴 찬란한 불꽃들이다. 이 불꽃들을 만들기 위해 그 자신은 숱한 고민과 어려움을 겪었다. 멀리에서 보고 즐기는 이들과 그것을 창조해내는 이들의 차이일 게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진행되는 한 편의 연극이 상연되기 위해 관객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오랜 기간 배우들의 맹연습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고흐에게 천국과 지옥을 함께 경험하게 해준 사건은 고갱과의 아를에서의 두 달여 생활일 것이다. 같은 길을 가는 화가들끼리 함께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고흐의 꿈 중 하나였다고 한다. 아를에 집을 얻고 친한 화가들에게 편지를 띄운다. 편지를 받은 친구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는다. 유일하게 찾아준 고갱도 고흐의 영향은 아니었다. 동생 테오에게 신세진 바가 많아 거절하지 못하고 온 게다. 고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갑고 설렜을까. 방을 마련하고 해바라기 그림으로 환영할 준비를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거는 두 달을 넘지 못한 채 충격적인 사건으로 끝나고 만다.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고갱은 그 후로 한 번도 고흐를 찾지 않았다.
그는 말년을 병원에서 보낸다. 주민들이 고흐를 정신병원에 수용해야 한다고 했단다. 병원에서도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당시 고흐에게는 그림을 제외하고는 존재의미가 없었을 게다. 마지막으로 옮겨간 병원에서 두 달여를 살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그에게 이 세상은 너무도 답답한 곳이었나 보다. 그림을 통해 뜻을 펼치고자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도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오직 동생만 자기편이었고 원하지 않는 질병이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젊음의 때에 시도했던 사랑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신이 흔들리는 불안 속에 그림의 선들도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통 속에 쏘아올린 불꽃들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사후 십여 년이 지나고 부터였다. 그 희열과 함성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늘을 오르고 터지기 시작한 그의 불꽃과 함께 그의 외로움과 고통, 성실함과 독특함이 이제는 인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언제나 나만의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이며, 나만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흐에 대한 사랑으로 아를과 오베르를 비롯해 그의 체취가 어린 곳들을 찾고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그리는 고흐나 당시에는 삶이 힘에 겨웠다. 하지만 고통의 때를 견디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면, 그들이 쏟았던 땀과 눈물들이 한데 어울리며 높이 솟아올라 후세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름답게 퍼져가는 불꽃놀이로 한없이 빛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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