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다시 아래로
진초록 덩어리가 공중에 매달려 물병같이 늘씬한 몸매를 보여줍니다. 따자고 아내는 성화를 대고 나는 내일 아침에 거두자며 하루 더 두고 보려합니다. 지지대와 철사를 타고 쇠 난간을 지나 옥상으로 향하며 열매를 맺는 호박이야기입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여러 덩이 호박이 열려 이웃 친척들과 나누고 우리 식탁의 풍미를 더해 주었습니다. 호박을 심은 걸 올해처럼 만족스러워 한 것도 드문 일입니다.
호박 줄기가 푸른빛을 드리우며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안쓰럽습니다. 호박의 큰 집쯤 될 듯한 아무런 수식어가 없는 박이 초가지붕위에서 둥그러니 몸피를 불리며 환한 달빛을 받던 옛 그림을 떠올립니다. 그런 종족이니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은 어색하지 않은가 봅니다.
호박과 일정 거리를 두고 단호박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 오르는 기세가 한층 사납습니다. 줄기도 더 굵고 튼튼합니다. 중간 중간에 튼실한 열매를 매달고도 사마귀 앞발 같은 덩굴손을 펼쳐 쉬지 않고 올라갑니다. 줄기와 잎이 무성하고 날마다 자라니, 식물이 아닌 듯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루사이에 저렇게 멀리 갔는데 한 곳에 붙박인 식물일까 싶습니다.
아침에 계단 가를 가보는 것은 호박 덩굴이 얼마나 더 하늘로 갔는지, 열매가 커져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입니다. 비와 햇볕만으로 어쩌면 저렇게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지 모를 일입니다. 호박이 작은 우유병만 해지면 아내는 애호박이 가장 맛있는 때라고 꼭지를 비틀고 나는 한껏 애달픈 마음을 품습니다. 호박은 빛깔이 누렇게 익어 씨가 꽉 여물 때까지 살아남아서 그 넉넉한 살을 동물들에게 주고 그 대신 자신의 씨앗으로 이 땅에 대를 이어 살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가장 큰 욕망이 생존과 번식이랄 수 있으니까요.
아침이면 진노랑 색을 뽐내며 벌들을 불러 모으던 잔치 열기가 조금은 식어가는 듯합니다. 푸르름을 보이던 많은 잎들이 누릇누릇 시들어 눈에 거슬려 그들을 잘라 버립니다. 한 때 열매들이 많이 달리고 스스로 알아서 약한 것들을 떨어뜨리더니 무슨 조화인지 이제는 피는 것마다 수꽃입니다. 한 여름 철사에 의지해 가파르게 오르던 하늘 길에서 지붕기와를 길 삼아 나아가다가 심한 가뭄에 줄기가 타고 작은 열매가 말라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은 그런 곳인가 봅니다. 그 참혹한 한 때가 지나고 옥상바닥으로 삶의 의지를 넓혀가는 생명의 끈질긴 힘을 봅니다.
밖에서 보면 녹색 생명의 줄기들이 한데 얼려 하늘로 치솟는 형상이더니 언제부턴가 방향을 틀어 아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베란다를 지나던 줄기와 잎들이 제 무게에 겨워 바닥으로 쳐지고 적은 수분과 옅어진 햇살에 그 색들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 번 더 힘을 내 안으로 안으로 기운을 모아 씨앗을 영글게 하는데 쏟겠지요.
하늘로 한없이 가지 못함이 숙명입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곳에선가 그 방향을 땅으로 잡아야 합니다. 몸피를 불리던 일에서 내실을 다져갑니다. 푸르던 피부가 누렇게 변해갑니다. 아직도 주변엔, 푸른 잎들과 반짝이는 애호박들이 자라나도 한 무리는 그 길을 벗어나 늙음과 성숙의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마음은 완강하게 고개를 젓고 있지만, 제대로 크지도 못한 채 내 자신도 녹색의 성장 길을 벗어나 단 맛이 들어가는 성숙의 길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길을 걸으며 하늘 향해 오르다 아래로 방향을 트는 출렁대는 덩굴손에 눈길이 머뭅니다.
익어야지, 맛이 들어야지, 내 속에 씨앗들이 영글어야지. 끝부분의 연하고 부드러운 넝쿨손에서 내 마음으로 눈길을 옮깁니다. 아무래도 초가을 햇살은 여름보다 부드럽습니다. 솜사탕 같은 덩어리구름 한 조각 푸른 하늘에 떠갑니다. 높고 푸른 가을하늘이 텅 빈 듯합니다. 한줄기 햇살이 따사로이 화단에 내려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