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진주알처럼

변두리1 2019. 1. 4. 13:03

진주알처럼

 

   하늘이 흐리더니 기어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는 눈발이 느리게 날리니 낭만이 끼어들긴 어렵다. 겨울이 되어도 눈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웬만한 눈은 내리자마자 사라지는 게 도시의 도로라지만 마음은 늘 불안하다. 찌푸린 하늘에 몇 송이 눈발만 보여도 긴장이 된다. 푸르던 집 앞 은행나무 잎들이 며칠 사이에 노랗게 변하더니 이삼일이 못가 다 지고 말았다. 그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그새 눈발이 날린다.

   학교가 멀지 않아 좋다. 기숙사에서 살던 때를 빼면 가장 가깝지 않나 싶다. 차로 십 분이면 가는 거리지만 눈발을 보니 서두르게 된다. 먼 하늘에서 내려와 차 유리창에 앉았다 흘러내리는 눈들을 무심히 바라본다. 지상으로의 긴 비행 끝에 환영받지 못하고 추락하고 있다.

   이곳쯤이다. 20여 년도 더 된 세월의 저편에 기억이 살아난다. 겨울이 좀 더 깊었나 보다. 아침에 어린아이들에게 가던 길이었는데 비가 내리고 길이 살짝 얼었었나보다. 언덕을 오르면서 차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양쪽 차선을 넘나든다. 깜짝 놀라 방향을 꺾으니 반대차선을 멋대로 주행했다. 긴장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짧은 순간이었을 게다. 그 때는 듬성듬성 풀이 나있던 언덕이었는데 그곳을 들이받고 차가 멈췄다. 천만다행이다. 몇 분간 언덕에 차를 박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어 차를 살펴본 후, 어린아이들을 태워왔다. 때때로 떠오르는 아찔한 기억이다.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이들에게 가끔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반응일 뿐이다. 내게는 충격적인 사건이 다른 이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기억할 만한 일도 아닌 게다.

   교실에 자리 잡고 시험을 친다. 어디에서 무엇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하지만 시험은 항상 나를 긴장시킨다. 인생에는 전혀 뜻밖의 일보다는 짐작하던 일들이 의도대로 되지 않아 겪는 고통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얼마나 준비하느냐가 중요하니 노력에 비추어 스스로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 내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방송대 체제가 좋다. 같은 과 학생이 몇 명인지도 모르고 서로의 성적이 어떤지도 알 수 없다. 비밀번호를 입력해 자기 것만 알 수 있으니 눈치 볼 일도 없고 신경 쓸 사람도 없다. 괜히 우쭐댈 일이나 주눅들 일이 없고 자신의 계획과 능력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면 된다.

   내 삶에 적극성이 부족함을 잘 알면서도 쉽게 고치지 못하고 있다. 반 너머 할 만하다 싶으면 대들어도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니 다른 이들이 먼저 뛰어들어 몇 번 실패를 거치고 목표를 이룬다. 시도하지 않으니 실수할 일이 없고 이룰 수 있는 일도 없다.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제 내 삶을 온전히 던질 일을 찾을 때가 되었다.

   시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그치고 비가 내리다 그마저도 멎어 있었다. 무성했던 일들을 떨어뜨리고 앙상해 홀가분한 가지에 반짝이는 말간 물방울들이 앙증맞게 맺혀 있다. 푸른 잎들이 무성하던 때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다. 이때에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왜 그동안은 저 맑고 빛난 광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내 마음이 눈앞의 광경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게다. 구름들이 눈비로 녹아내렸는지 여기저기 푸른 하늘이 드러나 햇살이 비치고 오가는 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넘친다.

   어려움을 거쳐야 겸손해지고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는 것 같다. 시험을 준비하며 실력 있는 학생이 되고 훈련을 거쳐야 강한 군인이 된다. 한줄기 비가 내린 후에 거리가 더 산뜻하며 깨끗하고 대기가 신선하다. 말간 물방울을 매달고 의연히 서있는 나무들 둥치가 든든하다. 겪어낸 세월이 주는 무게감인가 보다. 한두 해에 밑둥치가 굵어질 수 없고 겨울의 삭풍과 눈보라를 거치지 않고 나이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식어가 모두 제거된 문장처럼 잎들을 버린 겨울나무에서 오랜 훈련을 거친 정예용사처럼 든든함과 강한 의지가 흐른다.

   한두 시간 지나지 않아 사라질 진주처럼 빛나는 빗방울들, 같은 감탄사를 쏟아내도 사람마다 느낌의 강도는 다르다. 삶의 고통을 견뎌낸 진주를 마음에 간직한 이들이 곧 사라질 햇살에 반짝이는 나무 잔가지의 진주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이들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역설적으로 그 순간들은 짧아서 아름답다. 꿈결인 듯 스쳐가는 오후의 햇살에, 미끄러지듯 매달려 있는 물방울들, 순간처럼 스치는 아름답다는 각성이 어우러져 기억 속에 영롱한 보석으로 새겨지는 것 아닌가. 고통과 시련은 그 안에 이미 남모를 진주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렵다는 것 자체가 단단하고 빛나는 또 하나의 보석은 아닌가. 단단한 것만이 아니라 물방울처럼 부드러운 것들과 오래가지 못하는 순간적인 것들도 빛나는 보석이다. 그렇게 보면 주변에 보석 아닌 것들이 어디 있으랴.

   정갈하게 닦인 보석 같은 마음을 가진 눈으로 보면 숱한 것들이 보석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눈엔 아직 많은 것들이 보석으로 들어오진 않는다. 그래도 잎들이 진 잔가지에 맺힌 말간 물방울들은 내 마음에 맑게 빛나는 영롱한 진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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