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몸
작가 황원교의 자전적 장편소설 -
작가의 삶이 평탄치 못하다. 결혼 1주일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지체1급장애자가 된다. 이동이 부자유한 나무의 몸이 된 것이다. 고통과 좌절의 시기를 겪고 문학인으로 거듭난다. 입에 마우스스틱을 물고 글을 쓰기 시작하여 시와 수필과 소설을 쓴다. 인간 승리라 하겠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대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게 먼저다. 이 소설도 그가 겪은 것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을 게다. 먼저 작가의 노고와 의지에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강건이다. 이름처럼 견고하고 물러서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집요하게 나아간다. 주관이 분명하고 아는 게 많다. 하지만 강건하면 유연하지 못한 것 아닌가. 유연성이 없으면 자기세계의 확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고는 강건이 당하지만 모친이 먼저 지병이던 뇌동맥류이상에 과로가 더해져 죽고 여동생도 난치병을 고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남겨진 부친은 강건을 세심하게 돌본다. 성당에서 뜻있는 이들이 자원봉사를 오게 되는데 루시아 정수림이라는 여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여인은 강건을 연민을 가지고 능숙한 솜씨로 대한다. 간호사로서 비뇨기과 근무 경험이 있어 어색하고 힘든 상황도 여유롭게 넘긴다. 비록 환자와 자원봉사자 관계이지만 미혼의 여인이 장년의 남자환자를 목욕시키고 대소변을 처리하고 사타구니와 성기를 깔끔하게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일까. 사지가 마비되었는데도 가끔 발기가 되는데 그런 상황을 어색하지 않게 지나간다.
강건은 자기중심적이고 이루고자 하는 것에 집요함이 있어서 수림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하고 사랑을 원하는 접근으로 특별한 사랑을 하고 가까워진다. 그 과정의 묘사는 애정에 굶주린 이의 변태적인 서술 같아 읽기가 부담스러웠다. 수림이 자원봉사를 그만두고 같은 동네 신 여사라는 주인공과 스물네 살 차이나는 활동보조인이 그 일을 대신하게 된다. 강건은 수림이 떠난 후 한 달 서른 하루를 빠짐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죽은 어머니와 나이가 같은 신 여사에게 지속적으로 집적대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른바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게다. 그것도 어머니 같은 여인을 향해서 집요하게….
신 여사에게 대놓고 늘어놓는 성적인 이야기는 그 의도가 너무도 뻔하다. 강건은 한걸음 더 나아가 춘화 같은 미술작품 설명을 주절주절 풀어놓는다. 신 여사도 그닥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평생교육원 강의에 참여했다가 그 화장실에서 둘만의 일을 벌인다. 성격대로 강건은 갈 데까지 가보려 지속적으로 사정과 애원을 섞은 요구를 하고 신 여사는 일보 직전까지 받아준다. 마지막 단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은 그녀의 윤리의식이 아니라 강건의 부친과도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건 만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신 여사 역시 양다리였고 그것은 이 땅에 그들 둘 뿐인 아버지와 아들을 상대로 하고 있었던 게다. 이런 막장 같은 얘기가 어디 있을까. 작가가 독자들을 무시하는 것 같다. 하기야 처음 쓰는 소설이니 어떻게 하든 주목을 받고 싶고, 그래도 장편 속에 짙은 성애가 들어가야 할 것처럼 느꼈을지 모른다. 신 여사는 다단계에 관여하고 강건의 부친은 신 여사에게 돈을 투자하고 빌려주어 둘 다 돈을 날리고 차량을 이용하여 동반자살을 한다. 주인공 주변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게 만드는 거다.
재활치료과정에서 만난 형 같은 상명은 애인 송미경이 떠나가자 그 고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병원옥상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한다. 모친은 지병에 과로가 겹쳐, 여동생은 난치병 치료를 못해, 부친과 신 여사는 동반자살로 죽고 마침내는 강건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속력을 높여 물로 뛰어들지만 풀에 걸려 전동휠체어가 멈추어 죽지 못한다.
강건은 수림과 사실혼관계에 들어가고 자신의 할 일을 찾다가 작가의 길을 모색한다. 대학시절 신문방송을 공부하고 해외특파원을 꿈꾸었으니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나 보다. 소설에서 강건은 힘겹게 소설을 탈고하고 여러 출판사에 의뢰하여 한 곳의 도움을 받아 책을 출간하고 많은 인터뷰요청을 받는다. 행복한 마무리로 간다.
이 소설의 저자도 행복한 결말로 갔으면 좋겠다. “첫 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이 있다. 이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이 소설은 그다지 좋은 작품 같지 않다. 미숙함과 불편함이 많다. 저자가 더 많이 고생하지 않아서 독자가 고생하는 것 일게다. 독자에게 내가 몸이 불편하니 그 정도는 이해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독자는 그냥 하나의 소설로서 선택을 한다. 한번은 잘못 선택을 한다 해도, 같은 선택을 되풀이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저자의 고집과 열등의식, 불안과 소심함과 미숙함이 무수한 인용글을 나열함으로 독자들을 지치게 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어서 신선함이 없다. 기본을 모르는 칼잡이가 휘두르는 칼이라 생각해도 좋다.
반면교사처럼 자기중심으로 집요하게 원하는 바를 향해 손을 뻗쳐 욕망을 충족하고, 성에 대한 이야기를 염치없이 늘어놓아 성 담론이라도 부추겨보려 함인가. 문제의식도 없고, 주제도 없는 미숙한 소설 말고, 읽을 만한 소설을 쓰든지, 잘 하는 것이 무언지 그걸 하길 독자로서 요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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