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세 여자
- 극한의 혼란기를 이 땅에서 살아간 여인들 -
내 아버지는 1913년에 출생하셔서 1979년에 돌아가셨다. 내가 어렸기도 하고 우리 집안이 한미(寒微)해서 아버지께서 어떠한 시대와 삶을 살았는지 잘 몰랐다. 내가 사물을 분별하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대통령은 박정희뿐이었다. 내 세계는 무척이나 단조로웠고 우리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병영처럼 보였을 게다. 내 삶이 단순했듯 아버지의 삶도 간단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소설에서 보는 세 여자,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도 단선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20세기 초부터 후반 길게는 20세게 말에 이르는 기간을 살았다. 우리 민족은 1876년부터 1987년에 이르는 110여년의 특별한 시대를 겪는다. 병자수호조약이라는 운요호사건에서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해방과 한국전쟁, 민중혁명과 군사정변과 뒤이은 군부독재의 시대와 제2의 군부까지의 너무도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난다. 강도의 나라 일본에 의한 강점기에 그들에게 저항하던 이들과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을 기억한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을 괴롭히던 이들과 그들을 혐오하며 신음 속에 많은 민중들은 고난을 당했다. 서로 물고 뜯는 한민족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전 방위로 핍박하고 뜯어먹던 일제들, 그들에게 대들던 이들도, 독립 운동가들도 일제들의 눈 밖에 나고, 체포와 처단의 대상이 되면 국외로 떠돌거나 빨치산이 되기가 쉬웠다. 그 시절에나 친일과 반일로 동족 간에, 수탈과 독립을 위해 한일 간에 투쟁과 갈등으로 고통을 겪고, 삶이 극도로 피폐해졌거니 여겼었다.
고통과 갈등은 해방 이후와 이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선택도 쉽지 않았고, 찬탁과 반탁을 둘러싼 대립, 미국과 소련의 진주로 인한 남북의 정부구성을 두고도 치열한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지식인들뿐 아니라 서민들도 무엇이 좋은지,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힘에 겨웠을 게다.
역사의 어려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방과 미소에 의한 잠정통치에 이어 남북에 각각의 정권이 들어서고 서로 큰 소리만 치던 집권층은 북의 남침에 의해 동족전쟁을 치른다. 단시일에 부산가지 밀리며 거짓방송으로 서울을 사수한다며 도주하는 남측의 집권층이나 미국과 유엔군의 참전에 쩔쩔매며 다시 쫓겨 갔다 중공의 개입으로 다시 내려온 북의 군대, 미군의 반격으로 전쟁전과 비슷하게 형성되어 교착상태를 보이는 것으로 전쟁은 소강상태를 맞는다. 그 과정에서 남북의 민중들은 인공기와 태극기를 번갈아 들고, 눈에 띄는 대로 살기위해 부역을 하고 군에 끌려가면서도 의용군이 된다. 어느 편이 점령하는가에 따라 수세에 몰리는 이들이 바뀌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정답이 없는 선택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고 남북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일본이 분단되어야 할 것을 우리가 감당하고 이 땅의 전쟁에서 오히려 일본은 기력을 되찾고 다시 강대국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전쟁의 끝으로 평화가 온 것도 아니었다. 미⦁소로 나뉜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은 이념으로 완전히 무장했다. 남은 반공이 국시(國是)가 되었고 북은 남조선해방을 줄곧 부르짖었다.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반대세력은 발본색원(拔本塞源)되어야 했다. 북에 연고자가 있는 남의 가족들은 불안 속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남한은 1990년대에야 풀리기 시작했고 북의 형편은 명확하지 않았다.
이 격변의 때에 세 지식인 여성은 시대를 앞서 살고 있었다. 불만에 찬 현실에 실험을 거치지 않은 새로운 이론의 사회주의는 빛나는 무지개였다. 전통의 굴레가 지겨웠던 그녀들에게 공산당혁명은 황홀한 신기루였다. 청년의 때에 탄탄한 가정적 기반을 토대로 선택받은 고난의 길을 간다. 조선에서, 상해에서, 모스크바 같은 곳에서 그녀들이 경험하는 것들과, 어느 곳에서도 만만치 않은 알력과 투쟁의 모습들이 생존의 어려움을 증언한다.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이었던 체포와 구속, 심문과 고문 그리고 감옥생활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흘러 다니는 삶이 우리의 앞 세대의 이야기라니 할 말을 잃는다. 그들의 삶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었을까. 서로 얽히고 복잡해지는 여러 번의 결혼관계, 부침을 거듭하며 서서히 몰락으로 가는 삶, 자녀들까지 이어지는 운명의 끈을 본다. 아버지 허헌을 디딤돌로 그나마 나은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는 허정숙, 남부럽지 않은 지주의 가정에서 공산혁명에 눈을 떠 격랑으로 휘말려 들어간 듯한 고명자, 유복한 가정에서 순탄한 삶을 살 수 있었을 여인이 파도치는 풍랑의 삶을 사는 주세죽, 그들의 삶에서 인간이 무엇이고 또 인생은 얼마나 허망한가를 생각한다.
주세죽의 삶이 마음에 남는다. 음악을 즐기는 예술인이 될 뻔했던 삶이 박헌영을 만나고 그의 아내가 되어 모스크바에서 딸 비비안나 박을 낳고 혁명가보육원에 맡긴다. 헌영은 경성에서 체포되고 다시 모스크바에서 단야와 살림을 차리고 낳은 아이를 유형(流刑)길에서 잃는다. 카자흐의 크잘오르다에서 긴 유형생활을 하면서 딸을 가끔 만난다. 단야는 일본의 밀정, 박헌영은 미국의 밀정이라는 죄목으로 두 남편을 잃는다.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딸의 결혼식을 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과 남편의 이야기도 딸에게 다 해주지 못하고 딸을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하고, 이국땅 러시아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한다.
내게 이런 삶을 살라하면 살아낼 수 있을까. 그 삶을 통해 그들이 이룬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역사에 어떤 모습으로 새겨졌을까. 판단을 보류한 채, 역사와 주어진 인생 앞에 작은 내 모습으로 숙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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