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手) 싸움
한 달여 전 큰 아이가 깜짝 놀랐다며 뒤뜰을 달려가는 쥐를 보았다고 했다. 내게는 그다지 놀라운 소식은 아니다. 사람 사는 데 쥐 있는 게 뭐 그리 별스런 일인가 싶은 거다. 한편은 우리 주변에 들고양이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살아남은 것이 신기하다. 식탁에서 애들에게 어릴 적 쥐에 관한 추억을 들려주니 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아내는 아이들 편인지 영 불편한 눈치다.
아내가 조심스레 부른다. 가만히 가보니 그 녀석이 뒤뜰에서 뭔가를 오물거리며 먹고 있다. 아이들은 쥐의 얼굴을 보니 귀엽더라고 했다. 친숙한 얼굴이다. 저들이 인간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길고 길었던가. 쥐들이 인류보다 이 땅에 먼저 나타났고 자리 잡고 살아왔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 되리라. 동양권에서는 얼마나 친숙했던지 십이지(十二支) 가운데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간지의 역사가 적어도 수천 년 되었다니 그 이전부터 익숙하게 여겨온 셈이다.
쥐 한 마리를 잡으려고 약국에 가서 쥐약을 달랬더니 우리 안위를 걱정함인지 끈끈이를 주었다. 쥐구멍과 잘 다니는 곳을 골라 하나를 놓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걸리지 않았다. 하나를 더 준비해 자주 나오던 구멍 앞에 놓았더니 하루는 구멍으로부터 그것이 약간 밀려나 있었다. 끈끈이에 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성을 알고 밀어내며 다니는 게다. 그 쥐가 우리보다 단수가 더 높다고 할 수밖에….
십이지에 쥐가 가장 앞에 나온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이 첫째인 것은 약삭빠름이나 영리함을 얘기하는 것인지 모른다. “쥐새끼같이 약삭빠르다”라거나 “쥐도 새도 모른다.”는 말에서 그런 뜻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다시 약국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이번에는 쥐약을 샀다. 푸르스름한 쌀 모양이었다. 그릇에 담긴 대로 잘 다니는 곳에 두었지만 이번에도 효과는 없었다. 비가 오고 약 성분이 씻기어 땅에 스며들면 그곳에서 크고 있는 채소와 그것을 먹는 우리에게 해로울 것 같았다. 쥐 한 마리 잡으려다 가끔 그곳을 드나드는 참새나 고양이, 그밖에 많은 생명체에 재앙이 될지 몰라 약을 거두었다.
어린이 만화 중에 ‘미키마우스’가 있다. 내용도 잘 모르고 별로 본 것 같지 않아도 이곳저곳서 무수히 대하니 친숙하다. 쥐들이 실험용으로도 쓰이기도 하고 민담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 “쥐방울만하다” “쥐뿔도 모른다” “쥐죽은 듯하다”등 일상의 언어에도 적잖이 들어와 있다. 때로는 서생원으로 높여 부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오면서 친숙하긴 하지만 이득을 주는 일은 거반 없다. 양곡을 축내고 질병을 옮겨서 박멸의 대상일 때가 더욱 많았다. 얼마 전에도 땅에 묻은 음식물 찌꺼기를 파먹는 새끼 쥐를 보았다. 한 구멍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아내는 열심히 돌과 블록으로 막아보지만 녀석은 온갖 방법으로 장애물을 헤치고 나타나곤 한다.
가끔 내 집에 오는 이들에게 쥐 잡는 방법을 물어본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묘안(妙案)이 없다. 그동안 그렇게 자주 보이던 들고양이도 최근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차라리 그 쥐가 다른 곳으로라도 옮겨가 한동안 가족들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덫을 놓아보자고 제안을 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교묘하게 피하니 덫에 걸릴 것 같지는 않지만 제3 라운드를 치르는 느낌으로 임해보고 싶다. 경험도 많지 않고 어려 보이는 놈이 어쩜 그리 약삭빠를 수 있을까. 가족들이 쥐 한 마리에 시간과 힘을 낭비하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 서로 수(手) 싸움을 하듯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이다. 새끼 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열심히 먹이를 찾을 뿐 우리에게 호오(好惡)의 감정은 없으리라. 그러고 보면 서로 맞닥뜨린 관계가 꼬였다. 좋지 않은 일로라도 여러 번 대하면 정이 들고 함부로 하기가 어려워진다. 뒤뜰의 쥐와도 수차례 대했으니 못 보게 되면 서운하려나….
쥐가 되고 사람이 된 원인은 알지 못한다. 누구도 모든 지식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김없이 살아내야 하니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나는 윤회(輪廻)를 믿지 않는다. 시작과 끝이 분명한 직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사고능력과 감정이 있듯이 다른 생명체들에게도 이성과 감정이 있을까. 그들도 느끼고 판단한다면 인간들을 지나치게 이기적이라고 하리라. 내게도 나를 중심으로 사물들의 이롭고 해로움을 판단하는 개략적인 기준이 있다. 그마저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내 마음 한편에는 수 싸움에서 내가 지더라도 뒤뜰의 쥐가 잡히지 않고 천수를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생명에 대한 얄팍한 연민과 동정심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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