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리
가을밤은 소리로 온다. 무더위가 가니 청각도 살아나는지 구월이 오고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밤이 되면 한낮의 열기가 가시고 귀뚜라미 소리 내 가슴을 파고든다. 소리다. 귀뚜라미의 생명과 상징은 소리일 수밖에 없다. 초가을 가뭇한 하늘에 시원한 별들이 나오면 창문아래 그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한해가 가네…”
“정신 차리게…”
“서두르게…”
라고 외치는 것처럼 가을밤의 귀뚜라미 떼는 그악스레 소리로 내 마음을 헤집고 든다.
귀뚜라미를 한자어로 ‘실솔(蟋蟀)’이라고 한단다. 두 글자가 다 귀뚜라미라는 뜻인데 그것을 다 묶어 한 단어로 쓴다. 왼쪽 것은 변으로 벌레를 나타내고 오른 쪽 것들 ‘실(悉)’은 ‘다, 모두, 갖추다’의 의미이고, ‘솔(率)’은 ‘거느리다, 장수’같은 뜻이다. 어쩌면 ‘모두를 거느린 장수’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가을의 모든 것을 다 거느리고 앞장서서 찾아온 목소리 큰 장수가 귀뚜라미 아닐까 싶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의 외침을 들으니 “실솔, 실솔, 실솔…”처럼 들린다. 실솔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 소리를 흉내 낸 것 만 같다. 그가 외치는 듯한 ‘다 갖추고 앞서 가라’는 소리가 ‘일어나 채비하고 출발하라’는 외침처럼 들린다.
언제까지 누워있을 것인가. 아직도 한동안 더 뒹굴기만 할 것인가. 덥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떠는 내게 그들은 온 힘 다해 고함을 지르며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하긴 해야 할 것이, 하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음만 급하고 몸이 달 뿐이니 이제는 떨치고 일어나, 되든 안 되든 저들처럼 원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 붓고 싶다.
영어권에서 귀뚜라미는 크리켓(cricket)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귀뚜라미가 ‘크리 크리… ’울어서 그 소리를 따서 크리켓으로 했다고 하지만 내게는 끝없이 ‘클릭해, 클릭해…’로 들린다. 요즘은 무엇을 하든 컴퓨터를 통하여 하는 일이 많으니, 수시로 클릭을 해야 한다. 클릭이 시작이요 출발이니 ‘시작해, 시작하라고…’인 셈이다.
언제부턴가 한 해가 열 달 같다고 느끼고 있다. 이어 오는 두 달은 선물처럼 생각한다. 한 해의 일을 열 달에 마쳐놓고 지난 일들을 점검하고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면서 미진한 것들을 보충하는 두 달을 더해 한 해를 살고 싶은 마음이다. 창 가까이에서 마음 쓰이게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에 잠은 달아나고 정신이 더욱 맑아진다. 이 한적한 가을밤에 내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저들은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것인가.
높아진 하늘, 옅어진 햇살 속에 들판에 곡식들은 푸른빛이 조금씩 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잠자리들은 허공을 날며 더 깊은 가을로 가고 있던데…, 꽃밭에는 채송화 백일홍이 시들고 과꽃이 피어나고 길가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데 아직 시절 바뀌는 것 모르고 어물거리는 내게 스스로 정신을 차리라는 것일 게다.
비몽사몽간에 어렴풋 잠이 들었던가 보다. 수년 전에 하늘로 간 가까이 지내던 이를 태우고 내가 운전을 해서 어디론가 가다가 깼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왜 한동안 보이지 않던 다른 세상 사람이 꿈에 보이는가. 언제 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 후회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라는 것인가.
잠이 저만큼 더 달아나고 깊은 밤 혼자 들으니 ‘실솔, 실솔…’소리는 더 크게 마음으로 파고든다. 잠들지 못하는 이 밤을 저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는 일로 채워야겠다.
우리말 귀뚜라미도 소리를 의식해서 그 이름을 지었을 듯하다. 귀를 뚫을 듯한 소리니 얼마나 잘 지은 이름인가. 달리 ‘귀뚜리’라고도 불리고 있으니 ‘귀뚫이 ― 귀뚤이 ― 귀뚜리’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내 할 일에 태만하고 시간의 흐름을 읽지 못하니, 이제 정신을 차리라고 내 귀를 뚫기 위해 내 잠을 방해하는가 보다. 그렇다면 내게 피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려 함이니 나를 위한 자명종(自鳴鐘)이다. 알람을 두세 개씩 맞춰놓는 이들이 있다. 몇 분 간격으로 울면 점차로 정신이 들어 한두 번은 눌러 꺼버려도 마침내 일어난단다. 내 생각에는 하나면 족할 것 같다. 한번 울릴 때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나야지, 시간만 흘러가고 미련이 남을 뿐이다. 잘못하면 자명종에도 내성(耐性)이 생긴다.
이 밤 나를 위해, 귀뚜리가 와서 내 귀를 뚫고 ‘정신 차리고 할 일을 시작하라’고 온 몸으로 소리치고 있으니 더 이상 미적거릴 수 없다. 가을 소리에 내 원하는 것을 거둘 날을 그리며 힘껏 달려갈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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