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오늘의 사회를 평생학습사회라고 한다. 예전 사람들은 배움에 때가 있다고 했지만 이제 배움에는 정해진 시기가 없다.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배워야 그런대로 뒤처지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 보다. 모르는 것이 많기도 하고 특정한 필요가 있어서 ‘열린 대학’을 표방하는 많은 이들이 적을 두고 공부하는 곳에 다니고 있다. 편입한지 꽤 세월이 흘렀지만 지지부진하던 차에 다시 마음자세를 다잡고 임하고 있다.
한 과목의 중간과제물이 요약과 감상문의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어 열심히 내용을 요약하고 그 책을 전에 읽고 작성해 놓은 감상문이 과제의 요구사항과 큰 차이가 없어서 첨부해 제출했다.
한 달여가 흐르고 홈페이지를 보았더니 성적이 산출되어 있었다. 예상과 달리 30점 만점에 12점이 적혀 있었다. 주먹으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다른 것은 문제될 것이 없고 두 부분의 분량이 2:3이었으니 요약은 만점이고 감상문은 빵점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를 헤아려보니 그 글이 내 블로그에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과제물을 채점하면서 검색기를 돌린다고 하더니 그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점수도 서운하긴 하지만 내가 남의 것을 표절했다는 누명을 썼다는 것이 억울했다. 담당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내서라도 내 결백을 밝히고 싶었다.
그 과목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찾다가 빈번한 질문과 답변(FAQ)부분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채점이 끝나기 전에 개인블로그에 올려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라는 당부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한번 정해진 점수가 수정된 경우가 없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결국 내 부주의라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으니 본인이 조심하라는 것인데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일어난 일이 된 셈이다.
용어도 생소한 자기표절을 한 셈이 되었다. 한 자도 바꾸지 않고 제출을 했으니 빈틈없이 표시되었을 완전표절을 생각하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화해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과거에 학창시절에는 과대표가 있어서 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과제물을 모아서 제출하고 안낸 이들을 호명하기도 하고 제출기한을 연장해 주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옛날 일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작성하여 엔터키를 누르면 순식간에 아무리 먼 거리라도 제출할 수 있으니 신기할 뿐이다. 소설가들과 논문을 쓰는 이들에게나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표절이 누구에게라도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내 정신을 번쩍 깨우는 듯하다.
어디 그것뿐이랴.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기계들은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이미 들어와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기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는 알파고가 보여준 바둑실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기계보다 인간이 더 낫다고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있을까. 운동경기에서도 치료를 통해 기계의 도움을 받는 이들이 고유의 기능을 가진 이들보다 더 나은 기록을 보여주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인간의 일손을 덜어주고 불편을 줄여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기능을 얻기 위해 타고난 기능을 포기하고 기술적 기관들을 장착하는 시기의 도래를 상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자신보다 유능한 종을 거느리는 기분이랄까. 그런 종들이 자신들보다 무능한 이들을 언제까지 주인으로 섬겨 줄지도 의문이다.
숨을 곳이 점점 더 없어지고 있다. 모든 것이 드러나고 공개되는 사회에 산다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인지 모르겠다. 자율에 맡겨지는 영역이 줄어들고 타율의 영역이 늘어나는 것만 같아서 편치가 않다. 혼자만의 공간이 줄어들면 서로간의 신비감이 감소하고 변화의 폭도 좁아질 것이다. 경직되어가는 사회, 선택지가 없어지고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나아가는 사회는 우리를 질식시킬지도 모른다.
지역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가 재깍재깍 빠른 발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희생도 자원함도 의미가 없는, 그 일을 해야 하는 이들이 자판기처럼 가려지고 지명되는 기계가 지배하는 회색시대가 가까이에 와 있다.
내 집의 개인 컴퓨터로 원하는 자료가 어느 도서관 어디에 있는가를 검색한다. 그 정보를 스마트폰에 저장하여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찾아 대출기계에게서 빌리고 버튼을 누름과 거의 동시에 영수증을 받는다. 그 일을 다 하기까지 어떤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고 누구의 관리도 받지 않는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을 지나 개폐기가 알아서 작동하는 정문으로 차를 운전해 나온다. 이제 얼마가지 않아 자동차도 스스로 운전을 하게 된다니 사람이 할 일은 무엇인가. 할 일이 없으면 알아서 퇴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과제물 자기표절에서 시작된 상상이 너무 먼 곳까지 간 것 같다. 그래도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감정을 나눔이 살만한 것이 아닐까. 편리와 효율을 좇아가다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칠까 걱정이다. 이런 내 생각이 기우(杞憂)였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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