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야무야(有耶無耶)
내가 그 분을 만난 것은 30년이 훨씬 넘은 듯하다. 그동안에 개인적으로 만난 것도 수십 번이 넘을 것이고 여럿 가운데 만난 것은 헤아릴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세히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같다. 여럿이 모여서 별생각 없이 서로 의견을 나누다보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분이 맞는가 싶을 때가 자주 있다. 그런 때는 알다가도 모를 게 사람 마음이요 사람 일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 분은 웬만해서는 말이 별로 없다. 남들은 신중하고 과묵하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타고난 재주란다. 다른 이들이 십 분 할 말을 자신은 일분에 한단다. 긴 세월 지켜본 바로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 분을 특별이 싫어하는 사람은 거반 없다. 한 번은 본인에게 그 비결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잘하는 게 없는 덕을 보는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덧붙이기를 노래 운동 일 기술 어느 하나 내 놓을 만한 게 없고 키 작고 힘도 없으니 누구도 자신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몇 사람이 모이면 이런 저런 잡기도 하게 마련인데 그 분이 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저 밥이나 같이 먹고 목욕을 하면 끝이다. 예전에 집짓는 곳에 함께 있었던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측은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 분이 변명삼아 하던 얘기는 부모님이 삼남 일녀를 두셨는데 자신이 막내였단다. 위로 형님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일을 시키면 하는 일이 시답지 않고 진전이 없어 형들과 누나가 다 하고 자신에게 맡기지 않아 일하는 방법을 못 배웠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성장하면서 손재주가 있고 일머리를 아는 이들은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어떤 자리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을 하나씩 찾아보자고 했더니 그 분이 얘기한 것이 ‘유야무야’였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떻게 자신을 상징하는 말을 그런 허망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내세울 수 있을까. 하도 어이가 없어 하니까 스스로 설명을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되지 않으니 ‘있는지 없는지’드러나지 않고 그런대로 세상을 살아왔지만 이룬 일도 없고 작은 악기 하나 붙들고 이 년여 세월 보내 봐도 열심이나 재주가 없어 한곡도 연주 못하고 어릴 때 한 가지 운동을 일 년 넘게 했어도 파란 띠 한 번 못 매 봤단다. 그러니 어디 있으나 존재감이 없고 대단한 결심으로 시작을 해도 흐지부지 끝맺게 되니 ‘유야무야’보다 자신을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럴 것도 같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아릿하다. 같이 한 세월이 적지 않으니 별걸 다 함께 해 보았는데 태극권을 그 분과 여섯 달 가량을 한 스승아래서 배웠다. 어쩌면 그렇게 몸동작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남들은 얼추 동작을 익혀갈 때에도 그 분은 처음 한 가지도 순서가 맞추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즐거워했다. 잘못하는 이들도 농담 삼아 그 분을 보면 용기가 난다고 했다.
그런 분들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못하는 노래를 들으면 본인은 진땀이 나고 힘이 들어도 다른 이들은 우습기도 하고 무척 재미있기도 하다. 어떤 일을 해도 그 분과 같이 하면 제일 끝자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선지 어디서든 그 분을 보면 그 분을 아는 이들은 반가움에 즐거워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눈치다. 또 많은 이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같이 하고 싶어 한다. 가끔은 그 분이 그런 자리를 모면해 보려고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럴 때면 한가해도 바쁘고 없던 약속도 생겨나는 것 같다. 나는 알면서도 웃어넘길 수밖에 없다. 가끔은 민망해서인지 농담인지 자신의 나이를 감추기도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기상천외하다. 어떤 때는 유관순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도 하고 이순신의 거북선 노를 저었다고도 하고 세종대왕의 가마를 메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들어도 속지 않을 얘기를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되풀이하니 안됐다고 생각하고 그러려니 한다.
그 분이 요즘 들어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동화를 배워보고 싶다고 한다. 자신이 키도 아담하고 얼굴도 동안이니 동화에 잘 맞을 것 같단다. 동화를 무슨 아동복쯤으로 생각하는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어느 것이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말은 하지 않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갈는지 궁금하다. 큰맘 먹고 시작해도 얼마못가 또 실망을 하고 흐지부지 되지는 않을는지, 말은 그렇게 해도 어렵사리 결정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그 분야에도 기라성 같은 분들과 탄탄한 전문가들이 많겠지만 그 분이 늦게나마 꽃피울 자리를 얻고 잘하는 한 가지를 얻는다면 내 보기에도 참 좋겠다. 어느 분들과 함께 할지 모르지만 경계심을 품지 마시고 잘 돕고 챙겨 주셔서 그분도 ‘유야유야’하게 해주시길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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