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현재 관점에서의 과거의 재해석-
책의 내용은 E.H. 카(Edward Hallett Carr)가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강연할 당시 카의 나이는 69세였다. 카는 1892년 런던에서 출생하여 24세에 외무부에 들어가 여러 업무에 종사하다 44세에 사임하고 웨일즈 대학의 국제정치학 교수, 「더 타임즈」부편집인, 여러 대학의 정치학 튜터, 펠로, 명예연구원으로 있었다. 그는 14권에 이르는 「소련사」를 1945년부터 30년간에 걸쳐서 썼다. 많은 저술을 남기고 1982년에 사망했다. 인류역사상 가장 격동기였던 20세기의 수많은 사건들과 변화를 겪은 그는 당시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에 대항하기 위해 그 강연을 했다고 기록했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답한다.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가를 알아야 한다. 역사에서 역사가의 역할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들은 너무도 많지만 알려진 사실들은 지극히 적은 일부분이다. 그중에서도 취사선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덧붙이는 이들이 역사가들이다. 온전히 객관적인 역사는 존재할 수 없는데 그것은 사료의 선택부터 주관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현재적 관점에서 의미 있는 과거의 사건들을 불러와 과거를 재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역사가들이며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일 수밖에 없다.
그는 신의 섭리, 세계정신, 명백한 운명, 정해진 역사 혹은 그것을 이끄는 추상적인 힘들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모든 것을 행하고 싸우는 것은 현실의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마르크스의 견해에 찬성한다고 했다. 개인은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사회 속에서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가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역사의 진행을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어떤 힘, 이를테면 신의 영향력이라고 하면 어떤 연구도 의미가 없어진다.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역할은 너무도 제한적이고 잘못의 책임을 인간에게 물을 수도 없다.
역사에 지향점이 있는가는 많은 논란이 있었을 주제이다. 아마도 중세이전이나 19세기까지도 별 흥미를 끌지 못했을 화제였으리라. 중세까지만 해도 교회의 힘이 절대적이었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식이 몇몇에 의해 과점되었을 시대이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제는 목적론적 역사관을 내세우면 특정 종교에 매몰돼 있거나 상식이 없다고 여길지 모른다. 지식과 정보가 만인에게 열려있고 그 축적의 속도를 예측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는 상식을 벗어나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이 세력을 가질 공간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라는 물음보다 역사는 진화하는가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더 합리적으로, 개인의 권리가 신장되는 쪽으로, 더 살기 좋은 방향으로, 극한까지 발전하는 기계, 우주로 향하는 초정밀 과학의 시대 혹은 종말을 향하여, 지구의 멸망으로 가는, 이 땅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는 시대로 간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꿈을 깨뜨린 것이 어쩌면 20세기 아니었을까. 20세기는 전쟁의 시기라고 이름 지어도 좋을 만큼 이성이 맥을 못 쓴 시대였다. 러일전쟁, 일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이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에 이르도록 온통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 소용돌이를 건너며 인류에 대해 가졌던 기대가 너무 소박한 것이 아니었나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추진하는 어떤 선의의 힘보다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욕망과 충돌 그리고 좌절이 그대로 역사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저자는 역사에 대한 이해가 빗나가 목적론적 역사로 기울면 신학으로, 꾸며낸 이야기나 설화처럼 이해하면 문학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자신은 과학으로 여겨지기를 원하는 듯하다. 가설과 탐구로 확증하고 개별 사례들을 모아 일반화를 하자는 주장이다.
그는 기존의 역사가 유럽, 특히 영국중심으로 기술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언급한다. 지구가 말 그대로 흙 공으로 둥글어 어디나 중심이 될 수 있다. 특정지역 위주로 세계사가 이해되는 것은 강자에 의한 또 다른 폭력이다. 그 외의 다른 지역도 유사한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각 대륙과 지역은 나름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서로의 부족을 채워 함께 화합과 조화를 이루는 지구촌의 시대를 열어가는 것을 지평의 확대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류는 거대한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 왔다. 그 힘은 경험과 지식의 축적이라 할 것이다. 때로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한 발자국씩 내 디뎌 왔다. 하지만 ‘진보와 발전’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산업화와 기계화의 결과가 인간소외와 자연 파괴로 이어지고, 더욱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 더 두렵고 끔찍한 사회로 가는 듯하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와 미래를 조망하며 역사의 방향전환을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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