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경이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에릭 호퍼는 독일계 이주자인 가구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난다. 다섯 살에 계단에서 어머니와 함께 떨어져 어머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2년 후에 죽고 에릭 호퍼는 일곱 살에 시력을 잃는다. 아버지가 독학을 해서 영어와 독일어로 된 철학, 수학, 식물학, 화학, 음악, 여행 분야의 책을 100여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분류하면서 글자를 익혔다고 한다. 일곱 살에 잃었던 시력은 열다섯에 돌연히 다시 돌아온다. 그 후로 여러 곳을 떠돌면서 많은 육체노동과 독서를 하면서 지적인 활동을 통해 보여주는 에릭 호퍼의 능력은 예측을 불허한다.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일곱 살에서 열다섯에 이르는 교육의 황금기에 시력을 잃은 상태였고 열여덟에는 아버지마저 죽고 만다. 그는 시력이 돌아온 후로는 독서에 몰두한 듯하다. 언제 다시 시력을 잃을지 모르지 가능한 많은 책을 읽으려 했을 것이다. 시력을 잃기 전의 기억으로 영어와 독일어를 기억하여 대학교재 수준의 책을 읽으며 혼자 독학을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신기하다.
그는 떠돌이 노동자, 레스토랑 웨이터 보조, 사금채취공, 부두노동자를 전전하면서 도서관 같은 시설을 주로 이용하여 독서를 하며 학문에만 전념해도 만만치 않을 것을 혼자서 해낸다. 도서관에 수북이 쌓인 전공서적에서 무엇을 어떻게 골라 읽고 그것을 체계화하고 자기화하여 간직했을까. 그것도 철학 한분야만도 아니다. 역사와 문학 예술분야도 그냥 넘기진 않았을 것이다. 스틸턴 박사를 만났던 때를 생각하면 박사도 쩔쩔매는 독일어 해석을 힘들이지 않고 해낸다. 그런가하면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되살려 레몬의 백화현상을 이론적으로 추리하여 해결해 낸다. 삼십대 중반의 시기에는 산위에서 오랫동안 발이 묶일 것을 예상하여 활자가 작고 그림이 없는 오래 읽을 1,000페이지 가량의 책을 헌책방에서 1달러에 구했는데 그것이 몽테뉴의 수상록이었다. 그것을 읽고는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몽테뉴의 표현을 자주 언급해서 논쟁이 벌어지면 에릭 호퍼에게 몽테뉴가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는가 묻고 그는 그 구절을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The Idiot)』를 접하고는 운명의 책으로 알고 매년 그 책을 다시 읽곤 했다. 그를 만나는 많은 이들이 그토록 대단한 지성을 묻어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충고하곤 했다. 그는 가끔 학술적인 능력이 필요한 곳에서 일하다가도 다시 길 위의 노동자로 나서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두 노동자로 25년간 일하면서 말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한다. 생전에 10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학문적 연구만을 해도 쉬운 분량이 아니다. 65세에 CBS TV에서 인터뷰 대담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대화의 폭이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국 정책, 이스라엘 문제, 흑인혁명에서의 지도력 실패 등 사회 전반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 그의 많은 기고문과 인터뷰 그리고 저서들은 그의 지적이고 학문적인 재능들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없게 한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방법을 찾아 준비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하여 인생이 길 위에 있다는, 인생이 곧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정착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순간에 그는 번번이 다시 그 길 위에 올라 자신의 길을 간다. 그가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노동자들 중에도 놀라운 이들이 존재한다. 이 땅에 모든 이들이 독특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 살 것이다. 1달러에 간판을 그려주는 솜씨가 대단한 화가가 있는가하면 술에 찌든 모습이지만 멋진 연주를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양치기 노릇을 하다가 밀려 나지만 양에 대한 정성과 애착이 놀라운 이도 있고 기억력이 비상한 이도 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개척자에 대한 철학이 있다. 고난의 길을 가는 개척자들은 성공을 거두고 제자리에 안주하는 이들이 아니라 정착지에서 뿌리가 뽑히는 실패자들, 패배자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떠돌이와 개척자 사이의 유사성이 그를 사로잡는다. 약자 속에 내재하는 자기혐오는 일상적 생존경쟁보다 훨씬 강력한 에너지를 분출해 그들에게 특수한 적응력을 부여해 약자가 살아남을 뿐 아니라 강자를 이기게도 한다. 자신을 실패자, 패배자라고 깨끗이 인정하는 이들은 승자들과는 다른 길을 간다. 남들이 가지 않는 자기만의 길에는 찾아낼 수 있는 또 다른 것들이 있다. 오래도록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오히려 그런 많은 이들이 가지 않는 호젓한 길에 있는 것 같다. 에릭 호퍼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그런 길을 간 것인지 모른다.
책을 통해 에릭 호퍼를 접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인간의 재능은 후천적인 영역보다 타고나는 선천적 영역이 훨씬 많은 것 같다. 파트타임 웨이터 보조로 일하는 에릭 호퍼를 대하는 스틸턴 박사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자신보다 독일어를 더 잘하고 자신이 풀지 못하는 식물의 질병을 해결해내는 비전문가를 마주하는 그 박사는 스스로가 하찮게 여겨졌을 것이다. 패배자가 개척자일 수도 있다고 하니 누가 아는가, 내게도 그런 기회가 오고 있을지…. 그런 기대로 오늘도 부풀어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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