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평안으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두렵고 불안하다. 하룻밤 들판에서 잔다고 큰 일 날일이 아님을 알고 내가 십대의 청소년도 아닌데 주변을 자주 돌아보게 되고 마음이 쭈뼛거려진다. 이 들판 한 가운데 어디서 자야할지 모르겠다. 한 군데 쭈그리고 있어도 밤이야 새겠지만 내일을 생각하면 땅에 등 붙이고 머리를 눕혀 자야한다. 사위는 적막한데 가끔 어디선가 새소리와 짐승소리가 들려온다. 한참을 서있다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있다가 이제는 털퍼덕 앉아 있다. 이러다 졸음이 밀려오면 그대로 누울 것만 같다.
떠나온 집이 어른거린다. 어머니도 내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실 것이다. 어쩌면 내 걱정에 저녁밥을 드시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기온이 점점 내려가나 보다. 쌀쌀함을 넘어 싸늘하다. 보따리에 있는 옷을 다 껴입어도 따듯하지 않다. 짐을 한 곳에 가지런히 놓고 하나님께 이 밤을 무사히 지켜주시기를 부탁하고는 사각모양의 돌을 집어 베개를 삼는다. 길게 다리를 뻗고 하늘을 보고 누웠다. 뿌려놓은 듯 별들이 많다. 은하수에 눈이 닿으니 흐르는듯하기도 하고 멈춘 것도 같다. 하루 종일 걸어서인지 다리가 묵지근하고 눈꺼풀이 무겁다. 깜빡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따악’하는 소리에 온몸이 쭈뼛하고 잠이 달아났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알 수 없다. 다시 사방은 고요 속에 잠기고 잠이 나를 짓누른다. 이슬이 내리는지 몸이 눅눅하고 얼굴이 선뜻하다.
공중에 걸린 사닥다리가 보이고 그 위를 천사들이 오르내린다. 평화롭다. 사닥다리를 눈으로 따라 올라가니 하늘까지 닿았고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 계신다. 그 분의 모습에 두려워 아래를 향하니 땅에 닿아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나는 네 하나님이다. 네가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고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리라. 땅의 모든 이들이 네 자손을 통하여 복 받게 하리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지켜 주리라.” 저절로 잠이 깼다. 날이 새지는 않아 어둡지만 일어나 앉았다. 꿈이 너무도 선명하다. 꿈에 본 장면과 음성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다.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분이 이곳에 나와 함께 하심을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이 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다.
날이 새지 않으니 좀 더 자두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아서인지 춥거나 두렵지가 않다. 편안하다. 햇살이 얼굴에 비칠 때에야 잠이 깼다. 몸이 가뿐하다. 집에서 충분한 잠을 자고 깬 때보다 더 상쾌하다. 쏟아지는 햇살아래 풀포기들이 깨끗하고 싱싱해 보인다. 어제 저녁에는 내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함이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삶에의 자신감과 든든함이 있다.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겁날 일이 없을 것 같다. 두 팔을 휘휘 돌리고 다리를 굽혔다 펴기를 몇 번 했더니 힘이 솟는다. 아침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한다. 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움이 있다.
베고 누웠던 돌을 일으켜 세우고 그 위에 어머니가 챙겨주신 기름을 부었다. 이 곳은 이제부터 “벧엘”이다. 그래,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함께 하심이 감격스러워 나도 모르게 서원이 나왔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내 길을 지키시며 의식주를 책임져 주셔서 내가 다시 평안히 아버지 집에 이르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 돌기둥은 하나님의 집이 되고 내 모든 소득의 열의 하나를 반드시 바치겠습니다.” 내 입으로 한 말이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젯밤 꿈처럼 갈수록 명료하게 살아날 게다. 부모님께, 특히 어머니에게 내 걱정을 하지 마시라고 전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배고프지도 않다.
벌써 햇살이 따가워진다. 껴입었던 옷들을 벗어 다시 보따리에 싸고 하룻밤을 신세진 땅을 떠난다. 내게는 이제 “벧엘”이 된 잊을 수 없는 땅, 세월이 흐른 후 반드시 찾아와 하나님의 집을 세울 땅이다. 좁은 길을 벗어나 하란으로 가는 “왕의 대로”로 들어서니 벌써 태양은 이글거리기 시작하고 적지 않아 약대들과 상인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내 가는 여정에 아무 사고가 없어도 이 길을 스무날은 걸어가야 한다. 하란에서는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곳의 사람들은 나를 환영해 줄 것인가. 숱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지금은 그저 하란으로 가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주어진 일들을 잘 처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이제는 어떤 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어젯밤 하나님은 내게 약속해 주셨다. 더 이상 염려하는 것은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벌써 아침때가 지나가고 있으니 오늘은 집에서 가져온 돈으로라도 아침 겸 점심을 눈에 띄는 식당에서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일 듯하다. 집을 떠나도 앞일이 불확실해도 이렇게 평안할 수 있음이 신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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