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야곱

다시 밝아온 아침(야곱)

변두리1 2015. 9. 21. 22:06

다시 밝아온 아침(야곱)

 

  내 삶에 잊지 못할 하루가 지나고 둘째 날의 아침을 맞고 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제 일들이 오래 전 겪은 일 같고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다. 불안하긴 해도 하루가 지나니 차분해지고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아무도 없는 오직 풀벌레와 바람과 들짐승소리만 들려오는 들판에서 돌을 베고 검은 하늘 속 별들을 보다 피곤에 지쳐 곯아 떨어졌던 어제 밤이,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하루가 지나니 오히려 어제가 생생하다. 집 떠나며 부모님께 올렸던 큰 절 그리고 한없는 불안함, 아버지의 염려와 간곡한 당부 또 아들을 돌봐 주시기를 그분께 부탁하는 기도, 며칠을 버텨줄지 알 수 없는 단출한 보따리와 챙겨주신 비상금, 내가 안 보일 때까지 물기어린 눈으로 따라오시던 어머니의 눈길, 눈뜨자 들판으로 말없이 떠나버린 형 에서, 어쩌면 형은 집 떠나는 동생을 끝까지 지켜볼 자신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쉽게 넘어가지 않는 아침밥을 먹고 북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이름 모를 산등성이로 해가 뉘엿할 때가 되어서야 북적이는 시장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어두워져 하늘에 총총 별들이 뜰 때까지 걸어 도달한 곳에서 인가(人家)를 찾아갈 자신도 없고 주변에 불빛 보이지 않아 차라리 난생 처음 들판에서 자기로 했다. 형 에서는 사냥을 나서면 며칠 만에 돌아올 때도 있었다. 형 같으면 이런 한뎃잠은 별스런 일도 아닐 게다.

  칠십 대 중반에 처음 떠나본 집, 혼자 찾아 가야할 머나먼 길,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중에도 날은 저물고 피곤함은 몰려왔다. 남들은 가정을 이루고 빠르면 손자들을 볼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도피하듯 외가로 간다. 마음은 어지럽고 몸은 피곤해도 별들은 한가득 눈을 채우고 멀리서 들리는 들짐승 소리에 잠은 달아나고 두려움이 엄습한다. 갑자기 만난 낯선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줄 몰라도 설마 죽기야하겠나 하는 오기가 솟는다. 괴나리봇짐 머리맡에 챙기고 펑퍼짐한 돌 하나 베개로 삼아 하루 종일 땀 밴 옷 벗지도 못하고 모래밭에 몸을 눕힌다. 밤 깊을수록 추위는 싸늘히 밀려오고 축축한 이슬은 얼굴을 적신다. 어디선가 스르르, 바스락 소리만 나도 머리칼이 쭈뼛 서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 와중에도 슬몃슬몃 눈은 감기고 깜빡깜빡 잠이 들고 꿈에 빠진다.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신 그분이 꿈속에서 내 여정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잔 듯 만 듯, 부옇게 날이 새오고 사방이 드러나며 머리맡에 봇짐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오늘 또 하루 종일 처음 가보는 낯선 길을 가야 하리라. 얼마를 가야 외가에 도달할 수 있을지 혹 열흘 아니면 보름 또는 이십일. 이제는 모든 것을 나 홀로 해결하며 살아야 한다. 아니 그분의 도우심에 의지해 살아갈 일이다. 집 떠나기 전만해도 아무런 감흥 없이 맞이하던 세숫물과 아침밥, 이제야 그것이 얼마나 유복한 삶이었나를 알겠다. 이 낯선 곳 어디에서 세수할 물을 얻고 따듯한 아침밥을 먹을 수 있을까.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키니 이슬 맞은 몸이 눅눅하고 축축하다. 그래도 누워서 잔 잠이라고 몸이 조금은 개운하다. 어제 하루 종일 걸은 다리가 당긴다. 지금쯤의 집 일이 눈에 보이 듯 선하다. 남종들은 농기구를 챙기느라 분주하고 어머니와 여종들은 아침준비를 끝내가고 아버지는 약해진 몸으로 이런저런 보고를 받고 하루 일거리를 지시하실 것이다.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몸에 밴 듯한 일들, 익숙한 먹거리 냄새가 실제인양 코를 찌른다.

 

  지체할수록 외가에 가는 것이 늦어진다. 그곳에 가야 며칠을 살더라도 생활이 안정되고 삶이 의미가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서두르는 게 현명하다. 제자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하찮은 풀포기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집 떠나 하루를 살았지만 힘들기는 해도 외가를 찾아가는 것이 그런대로 할 만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하루를 들판에서 잤으니 오늘도 잠자리가 없으면 어디서든 편안하게 잘 수 있으리라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길을 떠나자. 누우면 자고 일어나면 또 걷는 것이다. 한낮의 더위가 대단하니 시원한 아침나절에 조금이라도 걸어두는 편이 더 낫다. 걷다가 물 있는 곳을 찾으면 세수를 하고 쉬기도 하면 될 것이다. 정 급하면 있는 돈을 쓰고 돈이 다 떨어지면 일손 필요한 곳에서 하루 일하면 될 것 아닌가.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힘이 있으니 못할 일이 뭐가 있는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삼 체면을 차리거나 부끄러울 것도 없다. 인륜에 어긋나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으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으리라.

 

  다시 큰 길로 접어들어 설레는 마음으로 하란을 향해 북쪽으로 걸어간다. 혼자가 아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시원한 아침에 길을 나선 이들이 큰 길 따라 하나 둘 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