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의 《혼불》을 읽고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한 세상-
소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강실이와 옹구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와 기원이 같았을 듯한 지배와 피지배 계급들. 때로는 부르는 명칭이야 달랐을 수 있지만 사라진 적은 없었다. 매안으로 표상되는 양반가문과 거멍굴로 상징된 천민들, 그리고 매안의 양반 가문에 의지해 살아가는 하인들. 마치 오늘날의 거대한 대기업과 그에 관련된 임직원과 하청업체와 일용직 노동자들이 연상된다. 실정법과는 무관하게 자행되는 향약과 미풍양속이라는 미명의 폭력들이 소스라치게 끔찍하다.
양반으로 살아가기보다 상민으로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할듯하다. 부인들의 서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콱콱 막힌다. 강수와 진예가 상피에 얽혀 삶이 망가지고 강수의 영혼을 이어주는 행사에서 또 일이 불거진다. 나약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시종 보여주는 강모와 그 주변의 숱한 피해자들. 겉으로 드러나는 이들만 해도 그리움과 한을 안고 죽음보다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강실, 부인으로서 명칭뿐, 충동적으로 남긴 아들 하나에 의지하고 미움과 연민으로 허허로운 삶을 이어가는 효원, 강모만을 보고 좇아가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첩으로 팽개쳐지는 오유끼, 아픈 마음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는 율촌댁과 살아생전 당하지 않은 입방아에 수군거림 그리고 편히 눈감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채 이승을 등지는 청암부인 등 강모로 인한 아픔은 너무도 크다.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은 만주 봉천으로 도망을 간다.
거멍굴뿐 아니라 사건전개의 중심역할을 하는 이가 옹구네다. 사랑할 수 없는 여인, 가까이 있으면 발로라도 세게 걷어차고 시원스레 욕 한바가지 쏟아 부어 주어야 할 것 같은 요망스런 여인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용기를 내는 이가 그네에게 당한다. 욕정적이고 뻔뻔하고 이기적이면서 치밀한 그 악녀를 당해내기가 어렵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툭툭 튀어나와 사건을 목격하고 관련자들의 목줄을 죈다. 강모와 강실이의 사랑의 순간에도 의도적이지 않았지만 옹구네가 그 장면을 보게 되고 강실과 춘복과의 관계도 다른 이들보다 먼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자신과 춘복과의 관계도 정리하지 못하도록 틀어쥐고 있고 효원과 오류댁의 결정으로 강실이 방물장수의 도움으로 피접을 떠나는 순간에도 동물적인 감각으로 끼어들어 볼모잡듯 자신의 집으로 데려다 놓는다. 강실과 강모 그리고 춘복과의 관계를 치밀한 계산속에 거멍굴과 원뜸과 매안양반가문에 퍼뜨리는 것도 그녀이며 봉출어미 우례를 위하는 척 이용하는 것도 그녀의 수단이다. 정확하지 않은 판단으로 춘복이 덕석말이를 당했지만 또 다른 찔리는 면이 있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이 한동안 고통을 겪을 때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준 것이 옹구네고 그때부터 아예 자신이 춘복의 마누라임을 온 천하에 공공연히 드러낸다.
천민들의 한이 뼈저리게 표현된 것이 당골네 만동이 아버지의 자신의 뼈를 투장하여 달라는 부분이었다. 얼마나 양반으로 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우면 죽으면서도 남의 무덤에 자신의 뼈라도 묻어달라고 하는가. 그 아버지의 한이자 자신의 한을 풀기위해 청암부인의 묘에 위험을 감수하며 투장을 하지만 결국은 들통이 나 부부가 모두 멍석말이를 당하고 남편 만동이는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이미 기울어진 양반들의 권세지만 그 부스러기도 대단했다. 청암부인도 가고 강모 강태도 매안에 없고 강실이 문제로 어수선해도 무너져 내리는 한 세상을 지탱해 보려는 몸부림이 안타깝다. 청암부인이 생을 마감하듯 시대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일본에서의 강호의 삶의 모습과 종들의 신분을 해방하라는 요구가, 춘복의 신분의 벽을 넘으려는 독기어린 결의가 시대의 흐름을 흐릿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타계하므로 결말이 선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큰 흐름이야 웬만큼 잡혔지만 작가의 손에 의해 그의 필치로 매듭이 지어지기를 기대했던 것은 채워질 수 없는 아쉬움이 되고 말았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묘사할 수 없을 만큼의 민속에 대한 세밀하고 박식한 정감어린 서술은 잃어서는 안 될 우리민족의 보석들을 모아서 정리해 놓은 느낌이다. 특히 전통 혼례와 장례, 연 만들기와 날리기, 세시풍속 같은 것들은 그 기록만으로도 보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보이는 역사교사 심진학의 변설과 호성암 도환의 사천왕상 해설 같은 부분은 소설 구성과의 긴밀함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오히려 소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지 않나 싶고 그러한 면에 쏟을 힘을 본래적인 이야기전개에 사용했다면 대미를 이룰 수도 있었겠다는 추측을 해 본다. 물론 아쉬움에서 해보는 말이다.
이런 대작을 남겨주었다는 것이 저자에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독자로서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인지를 길이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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