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넘어 오는 임이여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한 평가와 찬사들이 워낙 많고 범인과는 너무도 다른 인물인 듯 여겨져 오히려 거리감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중심인물이 그분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서 내 관점에서 그분을 생각해 보고 싶다. 주관성으로 인한 누(累)가 된다면 미리 사과하고도 싶다.
그분은 철저한 직업인이었다. 그것도 분명한 현실인식에 기반을 둔 전문가였다. 그가 지휘한 전투에서 전승을 했다고 하니 결코 우연이나 요행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개인적인 무예나 전투기술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주변국들을 파악하고 시대를 읽는 안목이 빼어났다. 거북선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며 식량과 장비를 비축했고 전장(戰場)이 될 현장의 지형과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선두에서 엘리트코스를 거치기보다 여러 번의 좌절과 고난을 겪으며 인간이해를 심화시키고 인격을 더 성숙하게 했다고 하면 지나친 낙관적 평가일까. 자신의 분야에의 몰입은 그 분야의 발전과 성취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고 민족을 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분은 여기(餘技)가 있었다. 현대인에게 스포츠나 음악, 여행과 같은 여기 혹은 취미는 직업적 압박감이나 삶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심신에 활력을 공급하여 일의 효율을 높이고 삶의 질을 높여준다. 여가생활은 고통의 완충제며 스트레스의 배출구(排出口)다. 그분은 시문(詩文)과 서예(書藝) 등의 여기(餘技)를 가졌다. 전투의 최고 책임자로서 압박감과 갈등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컷을 것이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한시(漢詩)를 짓고 이제는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된 난중일기를 기록하고 시조를 읊는다. 이러한 기록물에서 보여주는 글씨들에서 서예가적인 넉넉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승리에만 집착하는 무딘 감정과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아들이요 어버이요 지휘관으로서 걱정과 염려와 아픈 마음을 절실하게 표현하는 탁월한 문인이었다.
그분은 수치를 견디는 힘이 있는 분이었다. 그는 31세에 무과에 합격을 한다. 주위의 기대와 과거(科擧)에의 낙방경험은 삶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했으리라. 그는 42세와 52세에 “백의종군”을 겪는다. 오해도 받고 무고도 당한다. 두 번째의 백의종군은 심한 고문을 겪은 후에 이루어진다. 웬만한 이들은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지도 모른다.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기간을 견디는 힘은 확고한 자기신념과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분에게는 어떤 신념과 목표가 있었을까.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아정체성과 앞날에 자신의 할 일이 더 없이 분명하지 않았을까. 갈 길이 분명하면 주위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꿋꿋이 간다.
그분은 우리들을 일으켜 세운다. 이것은 후세에 미치는 영향력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다. 죽은 지 사백 년도 넘는 그분을 국가적 위기를 만날 때마다 우리를 일으켜 달라고 수시로 불러낸다. 마치 거대한 대가를 치루고 얻어낸 성과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UN참전 용사들의 죽음과 4 ‧ 19 혁명의 희생자들 그리고 1980년의 광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휘청거릴 때마다 새 힘을 불어넣어 일으켜 세우는 것과 같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분들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그분이 들 것만 같다. 지금은 통영시가 된 옛 충무시, 서울의 충무로, 아산의 현충사를 비롯하여 군부대와 병원, 해군함정의 이름 등 수많은 곳에 그분의 숨결이 살아있으며, 수시로 여러 모양으로 찾아와 흔들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하면 산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물러 설줄 모르는 용기를 보여주는 그분의 유명한 말들이다. 그분에게는 무모한 용기나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말들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의 분석에 근거한 사실의 언급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분처럼 자신의 직업에 정통하고 스트레스를 털어낼 분명한 여기(餘技)가 있고,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수치를 견뎌낼 수만 있다면 우리도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현실에 힘겨워 하는 이들을 일어나 설 수 있게 하는 선물이 될 수 있으리라.
그분은 시대를 넘어선 모두의 임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닮고 싶은 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