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기보다 제동기
시간적으로 약간의 여유가 있어 천천히 가고 있지만 오른 발의 느낌이 이상하다. 신호를 보고 꽤 먼 거리에서 제동기[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딱딱한 느낌만 있을 뿐 듣지 않는다. 차는 속도가 줄지 않은 채로 느리게 전진하고 반사적으로 거듭 제동기를 밟아보아도 작동하는 느낌이 없다. 갑자기 긴장이 된다. 차들이 신호에 걸려서 서 있으니 내 차도 서야 한다. 온힘을 다해 제동기(制動機)를 밟으니 속도가 조금씩 줄고 차가 멈춘다. 앞차와 거의 닿은 것 같은데 감촉이 없는 걸 보니 안 닿은 것이다. 운전자들은 차가 스치기만 해도 감이 온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뿐, 살얼음판을 걷듯이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해 주차를 했다.
강의를 들으면서도 언뜻언뜻 생각이 난다. 심란하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흩어져 제 갈 길을 간다. 주차된 차를 꺼내고 생각하니 고장 난 채로 거리에 나설 자신이 없다. 주변에 자동차 정비소를 찾아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짐작으로는 한동안 손을 안 보았으니 브레이크 오일이 문제가 되었지 싶다. 다시 돌아와 전화번호부를 찾지만 무엇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찾을 수가 없어 우여곡절 끝에 견인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보험서비스센터로 갔다. 내 짐작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라 잘 고장 나지 않는 부품이 망가졌단다. 속도를 내고 달리던 중에 고장이 나지 않아 다행이지만 기계라는 것이 언제든지 고장 날 수 있고,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할 뿐이다.
차를 타기가 싫은데 손 본 차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조작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 차가 정상으로 돌아오니 보조 제동기가 생각난다. 그 긴장되었던 위기의 순간에는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걸 사용했으면 마음이 좀 더 편하고 내 스스로 정비소를 찾아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당황하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을 내가 체험한 것이다. 아무도 안전을 자신할 수 없는 세상, 위기를 맞는 것은 순간이다.
평소에 제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 기능을 상실하니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가속기가 고장 나면 답답하기는 하겠지만 대형사고의 위험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제동기는 다르다. 고속질주를 하다가 차나 사람을 만나는 경우 급히 정지할 수 없으면 큰 사고가 나는 것이다.
자동차만 그러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일상의 삶에서 제동을 거는 것은 환영은커녕 비난 받기 일쑤다.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마저 깨냐는 투다. 실상은 칭찬하기는 쉽다. 비난을 받거나 관계가 어긋날 리도 없다. 듣는 이에게 자신감을 더해 줄 수는 있지만 안전장치는 아니다. 그에 비해 비판은 결코 쉽지 않다. 오해의 여지도 있고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평생 마음에 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판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 추진하는 일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게 한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 밑바닥을 살아 갈 때에는 이를 악물고 견뎌내지만, 잘 나가는 때, 모두가 칭찬하고 인정해 줄 때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신을 통제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다. 섰다고 여기는 순간에 넘어지고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추락은 시작된다. 이카루스는 밀랍으로 연결된 날개를 달고 스스로 제동을 걸지 못해서 추락하고, 파에톤은 아버지인 태양신을 만나 부자(父子)관계를 확인하고도 그치지 않아서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산하에 큰 재난을 초래한다.
우리 주변에서 그 사람 변했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는다. 형편이 좋아지니 스스로 제동을 걸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변했다기보다 그의 참모습이 드러날 기회가 없어서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렵고 힘들 때에, 아직 대단해지지 못했을 때에 철저하게 준비해 놓지 않으면 성공은 오히려 재앙일 수 있고 그를 망가뜨리는 것일 수 있다. 행운이 오지 않는다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낙담하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자신을 통제할 힘이 없으면 행운이 아무리 여러 번 찾아와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들 수 없고 철저히 준비를 갖춘다면 단 한 번의 행운을 만난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까운 이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는가. 자신감을 더해주고 귀를 즐겁게 해주는, 가속기 역할을 하는 말들을 듣기를 원했던 것 같다. 드러내어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내 주위 사람들을 보면 안다. 지속적인 관계에서 공정한 평가와 비판을 고깝게 여기고 싫어하면 그러한 이들은 떠나고 듣기 좋은 칭찬만 자주하는 이들이 남는다. 칭찬에 익숙한 이들은 내 삶에 깊은 애정은 없다. 잘 나갈 때는 함께 하지만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또 다른 잘 나가는 이들에게로 떠나가리라. 나를 비판했던 이들이 내가 어려울 때에도 함께 해 줄, 내 삶에 깊은 애정을 가진 이들이다.
가속기보다 더 중요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제동기라는 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