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아브라함

주인 가문의 경사(엘리에셀)

변두리1 2014. 8. 15. 01:10

주인 가문의 경사(엘리에셀)

 

  내가 이 가문에 하인으로 들어온 후로 요즘처럼 활기가 넘치고 시끌벅적한 때는 없었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고 준비해야 할 음식도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주인내외는 조금은 피곤해 보이지만 늘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살아간다. 내가 그들을 섬긴 후 십여 년까지는 주인내외의 웃음 끝에 허허로움이 달려 있었다. 이집트여종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얻은 후에는 주인어른은 어느 정도 매사에 힘을 얻는 듯 했지만 주인마님은 말수가 줄고 어딘가 그늘이 느껴지고 가끔은 여종을 심하게 책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삭을 출산하고 난 후에는 주인내외에게 자신감과 활력이 넘쳐난다. 두 분의 대화에서도 아들, 이삭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룬다. 최근에 주인은 하란에 두고 온 친척들의 안부를 알고 싶어 하신다. 아마도 그들에게 이삭 이야기를 알려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도 받고픈 모양이다.

 

  나는 청소년의 때, 방황의 시기에 주인어른을 만났다. 그 당시 가정 형편이 여의치 못하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다마스커스 거리를 배회할 때 주인가문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주인어른은 나에게 넉넉한 품삯을 줄 테니 길안내를 해달다고 부탁했고 나는 며칠 동안 맡은 일을 성심껏 해냈다. 주인이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 준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수일이 지나 주인은 내게 자신과 함께 가나안으로 가지 않겠냐고 제의했고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주인내외는 변함없이 나를 아끼고 믿어준다. 나도 어떤 일이든지 몸을 사리거나 꾀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인 분들을 섬겨 왔다. 내 이름을 지어준 이도 주인어른이시다. 내가 어려운 일을 해내면 주인어른은 그때마다 진심어린 칭찬과 인정을 해 주었다. 주인내외가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께서 저를 도우셨어요.”라고 얘기했더니 그것이 내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내 이름 뜻이 ‘내 하나님이 도우셨다.’이다. 돌아보면 내 삶 자체가 그 분의 도우심이다.

  주인내외는 자녀문제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심적 고통을 받아왔다. 주인어른과 함께 한지 십여 년이 넘어서자 그분은 나를 특별히 총애(寵愛)해 주었다. 때로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신이 죽으면 이 가문을 이끌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빈발로 들었는데 주인의 성품이나 거듭되는 말씀으로 보아 진심을 담아하시는 말씀 같았다. 하도 여러 번 이야기하니 내 주변의 종들도 그렇게 수긍(首肯)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이집트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그 이야기는 없어졌다. 주변의 많은 이들은 내게 “희망이 사라져서 안됐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히브리인이 아니고 주인어른이 갖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개인적인 관계도 없어서 가문의 정체성이 약할 뿐 아니라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으니 또 다른 가나안의 한 부류일 수밖에 없어 후계(後繼)의 의미가 없으니 세월과 함께 가나안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로는 가정의 분위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하갈은 가문의 합법적인 후계자의 모친노릇을 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향한 특별한 마음을 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안주인 사라는 그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쉽지 않았다. 이스마엘과는 문제가 없었지만 하갈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원래는 내가 편하게 대하는 관계였는데 본인이 후계자모친의 대우를 받기 원했고 내게도 격식을 요구했다. 그런가하면 사라는 하갈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이럴 때에는 주인어른이 나서서 정리를 해 주어야 하는데 그분은 그저 ‘서로 잘 알아서 하라 ’는 식이었다.

  안주인 사라가 이삭을 낳자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스마엘의 후계자로서의 의미는 약해지고 하갈에 대한 암묵적(暗黙的)인 예우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흥겨운 것은 주인 내외였고 불편해 진 것은 하갈 모자(母子)였다. 그 중에도 하갈은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겨워 했다.

 

  사람들은 내게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갔구먼.”하고 아쉬워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런 의사가 전혀 없어서 주인가문의 경사를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었다. 주인어른도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에는 한동안 나를 대하기 난처해했었다. 얼마 후에 주인은 나를 따로 불러서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했고 나도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노라며 정체성 이야기를 했다. 주인은 내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삭이 태어났을 때 내가 주인어른께 가장 먼저 축하를 드렸고 그분도 나의 진심이 담긴 축하를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직도 약간의 가변성은 있다. 이삭이 끝까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무슨 불의(不意)의 사고라도 생기면 이스마엘이 나서야 한다. 그런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이 있으니 하갈을 막 대할 수도 없다. 그 사이에서 매일매일 줄타기를 하는 주인어른이 안 됐다. 이삭이야 더없이 귀엽고 애틋하고, 사라를 향해서도 어떻게 대해도 아까운 것이 없지만 이스마엘도 아들이고 하갈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드러내기 어려우니 얼마나 힘이 들까. 그래도 이삭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크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고민을 상쇄(相殺)하고 남을 즐거움이 있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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