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아브라함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하갈)

변두리1 2014. 8. 15. 01:07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하갈)

 

  혼란스럽다. 변화는 편한 것이 아니라 두렵고 불안하기만 하다. 며칠 전에 여주인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부정하고 싶었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스마엘과 나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지 명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 적막(寂寞)한 가문에 한줄기 등불이 켜진지 십여 년이 넘어 안정이 되었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뒤흔드는 것은 무슨 심술인가.

 

  주인 아브라함이 가문의 대를 이을 후계자를 낳아줄 여인으로 나를 지명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구나 그것이 안주인 사라의 적극적인 권유였음을 들었을 때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집트에서 혈혈단신(孑孑單身) 따라온 내가 체력과 인간성을 비롯한 전반적인 면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 임신을 했고 보란 듯이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주위의 모든 이들이 내 아들과 나에게 관심을 쏟았고 아들은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요 후계자로, 나는 그 생모(生母)가 되었다. 여주인 사라는 누를 수 없는 질투(嫉妬)를 우리 모자(母子)에게 퍼부었으나 우리를 향한 아브라함의 따듯한 눈길은 우리가 힘든 것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훌쩍 넘어 어느 누구도 주인내외의 자녀출산을 기대하거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느 날인가부터 여주인 사라가 임신을 했고, 아들을 낳으리라는 소문이 집 안팎에 돌고 있었다. 백 살과 구십을 바라보는 주인내외의 임신소식은 최고의 이야기 거리여서 단기간에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무시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안주인의 달거리가 끊긴 것도 짧은 세월이 아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자식에 대한 집착이 빚어낸 상상임신이거나 아니면 임신한 것으로 행동하다가 출산시기에 맞추어 외부에서 은밀히 아이를 데려오려는 계산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내 아들 이스마엘 하나로는 불안하고, 집안사람을 통해서는 주인내외의 자식이 아닌 것을 숨길 수 없으므로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이고, 나이차이가 나는 둘째니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로 파악했다.

  그런데 한 달 한 달 세월이 흐르면서 더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 배가 더 불러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면 그 정도 노력은 따라야 하니까. 이상한 것은 몇몇 여인들이 아이의 태동을 확인했다는 소문이다. 주인들이 그토록 철저하고 교묘한 사람들 이었나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인들을 구슬렸거나 매수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번은 내가 가까이 지내는 여종도 확인을 했다고 해서 찾아가 물어보았다. 그녀는 분명하다고 했다. 내가 우리사이에 솔직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내가 영 불안해서 그러니 진실을 말해 달라고 해도 계속 사실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단단히 매수되었다 싶었다. 며칠이 지나 내 주위에 있는 여인들이 자신들도 확인해 보러 간다고 하면서 내게도 가자고 했다. 마음이야 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여주인과 직접 얼굴을 맞대기는 어쩐지 껄끄러웠다. 그렇지만 의혹을 푸는 일은 그것 밖에 없었다. 그들이 한두 번 더 권할 때 못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여주인 방에는 벌써 몇 명의 여인들이 와 있었다. 여주인은 나를 보더니 의외였는지 흠칫 놀라는듯하더니 곧 평정심을 되찾고는 얼굴에 자신감까지 보이며 내게 “자네도 왔구먼, 궁금했을 테지.”라고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고 누군가 아이가 노는 것을 보여 달라고 요청 하자 여주인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그럴까” 하면서 배를 걷어 올렸다. 맨 살이 드러나고 팽팽하고 불룩한 배가 나타났다. 충격이었다. 아무 가린 것도 속임수도 없었다. 한 여인이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곧바로 애가 논다는 탄성(歎聲)이 이어졌다. 여인들이 너도 나도 배위에 손을 얹고 신기해하며 덕담을 했다. 여주인은 머쓱하니 앉아 있는 내게 “자네도 만져 보게” 하며 배를 내밀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 손을 끌어다 배위에 얹었다.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분명한 태아의 심장고동, 그리고 꿈틀꿈틀 느껴지는 태아의 발길질. 분명한 아이였다. 여주인은 자랑스러워했고 한편으로는 나를 비웃는 듯도 했다. 내가 축하의 인사를 건넸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앞으로 내 아들과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지러웠다. 우리의 사정과 관계없이 세월은 흘러 얼마 전에 안주인은 해산(解産)을 했다. 드러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들이 아니기를 바랐다. 어차피 반반의 가능성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들이었다. 모두가 기뻐했으나 나와 아들은 슬펐다. 많은 일들이 갓 태어난 “이삭”(그 아이의 이름인데 웃음이라는 뜻)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관심 밖의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많은 관심과 친절을 보이던 이들도 잘 찾아오지도 않을뿐더러 이제는 안주인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아이와 안주인의 이야기들을 주워 나르기에 분주하다. 요즘에는 아브라함도 보기 힘들고 내 마음에는 근심이 한 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