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아브라함

내 아들 이삭(사라)

변두리1 2014. 10. 4. 03:17

내 아들 이삭(사라)

 

  남편 아브라함과 며칠째 냉전(冷戰) 중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이해하려 해도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이삭 번제 건 이야기다.

  남편을 사정없이 몰아붙여도 대꾸가 없다. 메아리 없는 외침에 나만 지치지만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다. 적어도 재발방지 약속이라도 얻어내야 한다. 이삭은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심상하다.

  하마터면 아흔에 낳은 금쪽같은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 할 뻔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긴 남편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고 그분의 명령이라고 하니 그 분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앞뒤가 통 맞지 않는다.

  답답한 건 남편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그렇게 얘기한다고 해도 자신의 판단이 그렇게 없을까. 스스로 상식에 따라 판단해서 옳지 않으면 거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아무리 자신은 이해가 된다고 해도 나하고도 한마디 상의는 해야 하지 않는가. 이삭이 어떻게 자신만의 작품인가. 열 달동안 배 아프고 고생한 것은 내가 아니던가.

 

  내 자신이 철저히 소외되고 무시당한 느낌이다.

  내 아이 이삭이 제단 위에 묶여서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살이 떨리고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다.

  남편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다보니 망령이 들어 상황판단이 전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요즘 집에서 가문의 일 처리하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를 더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들, 이삭의 행동이다. 한창 나이의 장성한 녀석이 백 살이 훨씬 넘은 노인의 행동을 왜 제지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앞에서든 뒤에서든 팔만 잡아도 남편은 멋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대도 녀석은 내가 파랗게 질려 물어보아도 아무 것도 아니란 듯이 너무도 태연하게 무섭지도 겁나지도 않았단다. 햇빛에 반사된 칼날이 시리도록 눈부셨단다.

  모리아 산에서 내려올 때 아버지 모습이 더 믿음직스러웠다고, 부친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알 듯 모를 듯 도통한 듯한 말을 했다.

 

  얼마 전에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열흘도 넘게 말을 하지 않는 시위를 했다. 기가 막힌 것은 남편이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너무 화가 나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집을 나갔다와도 아무 말도 없다. 내가 집을 비웠었다는 것도 모르는 듯하다.

  무언으로 시위를 해도 반응이 없으니 나만 답답할 뿐이다.

  꿈속에서 가끔 이삭이 제단위에 누워 있는 장면을 보곤 한다. 그 장면에서 아들이 나에게 소리쳐 도움을 요청한다. 순간 남편은 손을 치켜들고 그 손에는 시퍼런 칼이 들려있다. 이삭은 소리치고 나는 놀라 소리를 지르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깨보면 꿈이고 식은땀이 흥건히 흐른다.

  자주 전에 없이 가위도 눌리고 여러모로 약해진 것 같다. 사람들도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아도 내 모습의 변화를 알고 걱정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자다가도 자주 깬다. 그 일을 실행한 남편과 아들은 멀쩡하고 왜 나만 몸과 마음이 고통에 겨워하는 것일까.

  지난 것이야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앞일에 대한 다짐이라도 받고 싶은데 그것마저 쉽지가 않다. 나이 들며 남편의 집착이 세어져 가고 하나님에 관한 것은 이제는 누구의 말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번 사건으로도 분명히 확인이 되었다.

  젊었을 때와는 남편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 때는 내 말이 곧 가정의 결정권이었는데 이제는 중대사를 나와 상의도 없이 처리를 한다.

  아들도 내 영향력에서 떠나갔다. 어려서는 내 치마폭을 벗어나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더니 머리가 굵어지고 목소리가 패이더니 언제부턴가 자기주장을 시작했고 이제는 내게가 아니라 남편과 주로 상의를 하는 눈치다.

 

  안심할 수 없는 남편으로부터 아들을 지키려면 이제는 내가 좀 더 지혜로워 질 수 밖에 없다. 이삭이 결혼을 해서 며느리와 자식이 생기면 쉽게 다루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남편을 설득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며느리를 맞자고 해보아야 하겠다.

  며느리들이기가 잘 이루어지면 좋은 것들이 여러 면으로 많이 있을 듯하다. 가문을 잇는 것도 탄탄해 질 것이고 며느리 수업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어서 앞일에 대한 염려도 줄어들 것이다.

  내 생애 마지막의 가장 막중한 임무는 아들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앞으로는 아들이 가는 곳을 수시로 가보고 분위기를 살펴서 사고를 예방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수시로 며느리 맞기를 재촉해서 안전판을 마련해 놓는 일에 힘을 모아 보아야겠다.

  내 처지가 처량하다. 그래도 내 아들 이삭은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