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봉 다녀오기
작은 기대와 설렘을 품고 문을 나선다. 현실을 떠나 잠깐의 일탈을 감행하는 것이다. 집에서 이삼 분 거리에 장구봉이 있다. 복대동을 갓 벗어나 개신동에 속해 있는데 모양이 타악기인 장구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수천 년 그 자리를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켜왔을 텐데 대단위 주택단지가 들어서 남쪽이 반쯤 잘려 나갔다. 산자락은 휴식공간과 체육시설이 들어서 본 모습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장구봉이라기 보다 개구리가 쭈그리고 앉은 형상이 되었다. 그 곳은 나의 부담스럽지 않은 짧은 산책로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울창한 나무들이 반기고 조금만 올라가면 좁은 평지가 나온다. 그 한 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해 본다. 몇 년 전만 해도 열 개는 했는데 이제는 딱 반 밖에 안 된다. 마음은 항상 푸른데 흰 머리는 늘어 머리에 물들인지도 삼 년이 넘는다. 나이 들수록 세상은 커가고 내 자신은 작아져 간다. 심란해져 서너 발짝 오르니 바로 정상. 올 때 마다 사람들 서넛이 붙박인 기구로 운동을 한다. 전후좌우로 들어오는 올망졸망한 도시 변두리의 풍경들. 높든 얕든 정상은 성취감을 주고 사람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기를 원한다. 어느 유명한 산악인은 정상에 머무는 시간이 아주 짧다고 했다. 태극기 꽂고 확인사진 찍고 내려온단다. 세계적 높이의 이름난 산들은 정상에 오르면 몸과 마음이 다 탈진되어 안전을 위해서도 오래 머물 수 없다. 정상의 순간은 짧고 그 전후의 시간이 더 길다. 그런가하면 등정의 준비와 그를 추억하는 기간은 비교할 수 없이 더욱 더 길다. 마을 뒷산도 정상에 집착하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전 과정을 즐기면 더 느긋하다. 출발 전에는 기대감으로 신나고 일상으로 복귀한 후에는 되돌아봄이 흐뭇하다. 인생도 정상의 기간은 아주 짧다. 젊을 때는 정상을 꿈꾸며 준비하고 나이 들면 정상의 시절을 돌아보며 아련해하고 그리워한다. 그러나 정상의 순간만이 아닌 매 순간을 즐길 수 있으면 평생이 행복하리라.
정상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면 나무로 만든 난간과 계단이 있고 좌우에는 살아 있는 나무들이 적당히 늘어서 있다. 죽은 나무는 손잡이 난간과 발 닿는 계단이 되어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산 나무는 잎새와 꽃들로 오감을 즐겁게 한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높은 건물이 없어 눈길이 자연스레 하늘로 가면, 푸르면 푸른 대로 흰 구름 떠가면 또 그대로 먹구름 끼어도 정다운 마음의 고향, 삶의 기쁨과 슬픔의 완충지가 그곳에 있다. 내리막 계단으로 다시 눈길을 주면 신록 속에 산수유 한 그루가 서 있다. 다가가 마주하면 이파리 하나에도 한 세상이 있다. 큰 도로가 있고 골목도 있고, 윤기가 흐르는 곳이 있는가 하면 마르고 황폐한 곳도 있다. 이미 삶을 다하고 떨어질 날 만 기다리는 잎들도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려는 듯, 어쩌면 체념한 듯 가지에 매달려 있다. 맞은편으로 두 세 걸음 옮기면 새로이 만나는 산벚나무 늦게 핀 꽃송이가 민망한 듯 숨어 있다. 꽃 피고 지는 시기가 어찌 나무의 뜻이랴 이르면 이른 대로 늦으면 또 그대로 흥취와 반가움이 있다. 모든 꽃 활짝 필 때 한 송이 더하는 것 보다 다른 꽃들 다 졌을 때 홀로 피는 것은 뭇 시선을 혼자 받는 뜻하지 않은 호사이다. 어린 시절 즐겨 먹던 오색 초콜릿 사탕 같은 황홀한 열매들이 한 나무에 눈부시게 달려 있다. 계단 끝은 다시 일상과 이어지고 장구봉을 벗어나며 생각이 많아진다. 오가며 주로 사람들만 내 속에 담겼는데 이제 길 위에 뒹구는 열매가 보이고 산 속의 큰 나무 작은 풀, 새들과 곤충이 함께 있음을 눈치 채게 되었다. 알고보니 산은 인간만의 산이 아니라 온갖 동식물들과 생사를 넘어 선 모든 존재들의 터전이다. 모두가 치우침 없이 함께 조화롭게 살아 갈 영원한 공간이다. 삭막한 도시의 한 구석에 작더라도 공원은 정말 고맙다. 예전에는 청주에 공원이 몇 군데 없었는데 이제는 새로 서는 동네 마다 없는 곳 없다.
짧은 거리에 이십여 분 시간이지만 생활의 번잡한 먼지 덜어내고, 하늘과 땅 풀과 나무 기운 받아 새 힘을 담는다. 새 힘이 있으니 달릴 수 있고 재충전이 되었으니 풀어 놓아야 한다. 이런 저런 생각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귀소본능에 충실한 내 발걸음은 어느덧 집 앞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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