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즐기면 족하지
겨울과 헤어진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잠간의 봄을 지나고 여름으로 접어드는 듯한 날씨다. 밖에 나서면 반팔은 물론이고 반바지차림도 어렵지 않게 본다. 오늘 오후에 집 가까이 산책을 하다가 아파트 담장을 보니 어느새 붉은 장미가 무리지어 활짝 피어있다. 만개한 장미에 정신이 번쩍 든다. 벌써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그런데 조금 더 걸어 학교 담에 이르니 꽃잎이 나오지 못하고 이슬람성당의 돔형 지붕처럼 녹색의 봉오리에 싸여 있다. 한층 마음이 놓이고 안심이 된다.
그 후로 장미 송이가 쉽게 눈에 띈다. 내 어릴 때만 해도 장미꽃이 대단히 귀한 꽃이었는데 이제는 담을 수놓는 흔한 꽃이 되었다. 의식하고 장미꽃을 실컷 구경한 것은 아마도 작년이 아닌가 싶다. 한두 해 사이에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내가 꽃을 볼만한 여유가 없었거나 아니면 꽃을 느낄만한 나이에 이르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주민들과 건설 회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조경품목이 나무로는 소나무, 꽃으로는 장미가 아니었을까. 산책을 하다보면 오월 중순을 넘어 칠월까지는 장미를 넉넉히 볼 수 있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것이 장미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알고 있는 꽃이 몇 개 되지 않는데 그래도 장미는 어려서부터 알았으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장미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지난해에는 천천히 자주 걸으면서 길에 떨어진 장미꽃잎을 많이도 보았다. 심지어는 그 꽃들이 천시 받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많으면 흔하다고 말하고 그것은 곧 귀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를 품위 없는 꽃이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장미만큼 고귀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꽃도 많지 않다. 꽃의 여왕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아직은 장미가 활짝 핀 곳이 많지 않다. 하지만 경험으로 몇 송이가 피면 얼마 있지 않아 수많은 장미꽃들이 만개할 것을 안다. 장미의 계절이 왔다. 문을 들어서며 아내에게 아파트 담에 붉은 장미가 활짝 폈다고 했더니 별 반응이 없이 볕 잘 드는 곳이나 그럴 것이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나보다 먼저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들은 이미 다 아는 걸 혼자 늦게 알고서 가장 먼저 본 듯이 얘기하는 나 자신이 우습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장단 맞춰주지 못할 것은 또 뭔가. 어차피 사람마다 개인차는 다 있는 것인데….
옆문을 열고 우리 꽃밭을 본다. 작년에는 육거리시장에서 사다 심은 장미가 화려했었는데 올해는 쓸쓸하다. 장미도 나무라 당연히 여러 해 살 것으로 생각하고 뿌리로부터 바짝 잘라 주었더니 죽었는지 여태 별 반응이 없다. 어쩌면 겨울추위에 얼어 죽었는지 모른다. 지난해에는 천적인 벌에게 수난을 당해 사나운 꼴을 겪었는데 올해는 그나마 얼굴도 볼 수 없나 보다. 아내도 그 일로 장미에 대해 미안하고 언짢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 노점에서 몇 개 사온 화분 중에 작은 장미가 하나 있어서 꽃밭에 옮겨 심었다. 달랑 작은 것 한 그루. 지금은 그 중에도 한 송이가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문밖에만 나서면 지천으로 피어있는 장미를 실컷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내 것이 아니면 어떤가. 보고 즐기면 족하지. 자기들의 담에 쉴 새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도 무감각하게 지내는 이들보다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는 이들이 그 꽃의 주인이 아닐까. 꽃도 시일이 지나면 시들어 떨어지니 아름다운 것 아닐까. 늘 함께 할 수 없음에 더욱 가치가 있다. 정해진 기간을 사는 인간이 같은 시기의 사람들, 꽃, 나무들과 어울려 즐거움과 아픔을 함께 함이 얼마나 행복하고 정겨운 일인가. 그때에 굳이 내 것과 네 것을 고집할 것은 무엇인가. 서로 보아 즐겁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격려하고 위로받음이 함께 사는 것 아닌가. 장미꽃을 소유하지 않아도, 향기를 일부러 맡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다.
그것만으로도 장미의 계절은 여러 감각을 통해 나를 넉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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