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역 목회자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던 이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다. 아는 이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 중에서도 한 자리에서 맛난 음식을 함께 나눈 연세 지긋한 목사님 내외분이 더욱 반가웠다. 긴 세월 한 동네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요 선후배로 또 성경읽기와 취미활동을 함께 했었다. 올해 팔순이 되셨다고 하는데 몸이 꼿꼿하고 건강해 보이신다. 60대 후반 같다고 하니 고맙다 하신다. 사모님과는 한 살 차이라 하는데 역시 나이 들어 뵈지 않으셨다.
현역 목회에서는 오래 전에 물러났지만 한쪽 모서리를 굳건히 지키고 계시는 것 같다. 아들 중 한 분이 목회를 하니 그 현장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기도를 하신다. 새벽과 저녁으로 하루에 네 시간 가량 기도하신다고 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게 된 분들, 250여 나라들과, 77억 인류를 위해 매일처럼 기도드린다고 하신다. 그분 성격을 아는지라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과장도 거짓도 없는 분이시니 놀라울 뿐이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했다. 그때마다 정확히 이름을 기억하고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신다. 기도의 힘이다. 매일 빼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니 이름 뿐 아니라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그분들과 관계된 소식에 민감해 기억에 새겨지는 게다. 나이가 들고 눈에서 멀어지면 몇 달 지나지 않아 기억에서 가물거리다 사라지는 게 일상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입고 그 안에서 사시는 게다.
사는 곳에서 두 분이 매일 두어 시간 산에 오르고 산책을 하며 운동을 하신단다. 그만한 연세에 건강이 약화돼 고생하는 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삶의 균형을 잃으면 건강을 상하기 쉽다. 60대 초반에는 물구나무를 서서 손을 짚고 걷기도 하고 머리만 땅에 대고 긴 시간 버티기도 하셨다. 장수형의 체격과 힘을 타고 나셨지만 지속적인 노력이 아니면 유지하기 힘들었을 게다. 20여년 넘게 알고 지내오는데 한결같은 모습이다. 팔십 연세에 지금도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분들과 함께 기도회를 갖고 그 모임을 주도하고 성경 말씀도 줄줄이 꿰고 계신다. 내 보기에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다. 언제나 청년 같기만 하신 분이다.
그분의 성장시절을 상상해본다. 1943년 같은 혈족들이 모여 살던 연기군에서 손이 귀한 가정에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으니 어떤 세월을 지내셨을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겠다. 그 시절에 현재의 신식교육을 하는 학교가 많지 않고 일반화되지 않았을 테니 한 때 서당을 다니셨을 게다. 몇 년 늦게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입학하고 대단한 힘과 체격으로 한 가닥 하는 학생들에게 한동안 경계와 시비의 대상이 되었음직하다. 정상적 과정을 거쳤다면 1950년대에서 60년대 말까지가 학창시절이었을 게다.
좌우익의 극심한 혼란, 나라를 온통 두세 번은 휩쓸었을 민족적 동란과 전후의 가난을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개화된 교육보다는 몸을 사리며 피해를 당하지 않길 바라는 집안어른들의 보호 속에 한때를 지내셨을 테다. 나름대로 청장년 시절에 생계를 위해 애쓰다 뒤늦게 신앙을 접하고 여생의 일로 소명을 받아 방향을 전환하셨으리라. 갈래가 많은 대한 예수교장로회 소속이었으니 정확한 신앙적 지향성과 학문적 배경을 내가 알기는 쉽지 않다.
늘 환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악수하고 덕담하는 자세와 긴 세월 한결같은 모습을 뵈면 그분의 천성을 알게 된다. 목회에 있어서도 새 사람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성경읽기를 생활화하시고 동료 목회자들의 화합과 친목을 위해 항상 애쓰니 목회자의 바른 자세에서 어긋남이 없었다. 어머니연세 100세가 넘도록 손수 오래 모셨으니 효성도 지극하셨다. 그분이 어떤 외국의 신학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남의 흉을 지적하는 것을 보고 들은 기억이 없다. 중세나 근세의 사상가들에 대해 말씀하는 일도 없었다. 늘 성경을 얘기하고 실생활을 예로 드셨다.
동료목회자들이 내 삶의 자취를 대충은 안다. 내 신앙적 지향성이나 교단 배경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목회자의 정상적인 과정을 거쳤음을 알고 이런저런 것들을 기대하기도 했을 게다. 사람과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지만 내 삶을 그분과 견준다는 것 자체가 민망하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굴곡져 있고 남들에게 내 스스로를 자신 있게 활짝 열지 못한다. 그분보다 신체적 나이가 훨씬 젊지만, 건강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 젊다고 말하지 못한다. 현역에서 물러날 계획이 없지만 끝까지 기도와 전도에 매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번 연락하고 놀러오라 하신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아내도 한번 찾아뵙자 하지만 삶의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자신이 없다. 그 열정 앞에 내 초라한 모습을 비춰 본다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 작아지는 일인가. 다 내려놨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많은 것들에 힘겨워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주님의 말씀 속에, 사도 바울의 삶의 행적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에 온전히 잠겨 살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문득 돌아보니 내 걸어온 길이 짧지 않고 주변에 선배보다 후배들이 많다. 내 현재와 선배들이 헤쳐가고 있는 노후의 삶을 본다. 생각이 많아지고 그 분들이 그냥 존경스럽다. 한동안 못 뵌, 낮에 만난 목사님과 사모님에게서 변함없는 현역 같은 목회자의 모습을 확인한다. 닮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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