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에 대한 고백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속고 있다. 내가 무식한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나는 무식하다. 내 천연덕스러움에 속는 줄도 모르고 그들이 속고 있는 게다. 그런 일이 계속되니 서로 최면에 걸려 나도 내가 무식하지 않은 것 같고 내가 무식하다하면 그들은 겸손하다 한다. 이제부터 내 무식을 고백해 보자.
나는 목사라고 불린지 서른 하고도 일곱 해가 된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몰입하면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는데 그 기간의 배하고도 또 배가 되어 가는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 성경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은 내게 많이 읽었다고 하지만 등장하는 나라와 지역, 시기가 헷갈린다. 게다가 예언서 부근에 가면 길을 잃고 뒤로 갈수록 비슷해 긴가민가하기만 하다.
아직도 믿음과 상식이 배타적인지 조화를 이루는지 모른다. 상식을 따르자니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버리자니 불안하다. “그러니 기도를 해야지”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또 억울하다. 분간을 잘 하지 못하니 분명하게 의견을 밝힐 수도 없다. 의견을 논리적으로 확실히 드러내야 설득력이 있는데 그러지 못하니 말할 땐 웅얼거리고 남의 말을 들으면 잘 설득 당한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그나마 엉성했던 내 판단기준이 더욱 어수선해졌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는데 모이지 말란다. 주일성수(主日聖守)를 생명처럼 알았는데 예배를 드리는 게 마치 공동체를 해치는 것처럼 되었다. 교회가 사회를 섬기고 지역과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고 알았는데 마치 혐오시설이 된듯하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소리쳐도 비웃음거리 이상일 수 없을 것 같다.
생각이 부실하니 행동으로 옮기기도 어렵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데…. 당황스럽다. 이러면 안 된다고 내 또래나 그보다 나이 조금 많은 분들이 태극기를 달고 들고 한동안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교회에서 통성 기도할 때에 나는 어리바리한 채 방관자로만 머물렀다. 많은 분들이 유튜브를 언급할 때 나는 늘 꿀 먹은 벙어리였다.
언제부턴가 뉴스를 판단할 수 없어졌다. 아니 본래부터 그랬는지 모른다. 상황전개가 내 예측과 빗나가기 일쑤인데, 주변엔 확신에 찬 목소리들이 가득하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신문을 세 개 보고 인터넷으로 진보와 보수 중도를 표방하는 언론들의 사설도 꽤 보는데, 내 모르는 정보들은 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람들은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접할까?
최근에 언론과 방송에서 집중적인 비난을 받는 이들에 관한 기사와 보도를 접하며 믿음과 상식을 다시 생각한다. 내 의식구조 속에 하늘 것보다 땅에 것들이 많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변명에 더하여 천지인(天地人)을 들추며 하늘 일뿐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돈과 흥미와 감각에의 추구를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닌가.
혼자 있을 땐 나름 견고한 삶인 듯한 데 가끔, 이른바 잘 나가는 이들을 만나면 기죽고 주눅 들고 조용한 연못에 돌이 던져진 듯 내 사색의 호수에 한동안 잔물결이 이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자기 확신의 흔들림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래, 이제 와서 나보고 어쩌라고?’ 식 버티기도 슬슬 고개를 든다.
성도들이 하늘 것에 더 민감하고 땅에 속한 건 잘 모를 것 같은데 때론 오히려 땅의 것을 하늘 논리로 따지고 구석 치우친 곳에 따로 사는 이들처럼 보일 때가 있다. 거룩한 영을 품고 하늘나라를 꿈꾸며 하나님과 통신하며 살기보다 땅에 뿌리박고 땅에서 온갖 성공과 영화를 누리려는 이들 같기만 하다. 내 관심의 많은 부분이 땅의 일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남을 먼저 배려하기보다 내 이익에 먼저 눈이 간다.
가을이 오면 산과 들의 열매들은 노랗고 붉게 익어, 달고 고소한 맛이 드는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건만 나는 왜 아직도 푸르뎅뎅함을 벗지 못하고 시고 떫은맛만을 지니고 있는가. 동안(童顔)이라면 마냥 흐뭇해하고 한사코 아직 젊음을 보내지 않았다는 생활태도에 원인의 한 가닥이 있을 게다. 다 어리고 젊으면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것인데 어쩌자는 것인가. 인생은 모든 단계가 은총이요 축제니 내게 맞는 축제를 찾아가야지…. 깨달음과 느림과 성숙과 지혜의 장으로 가야 할 것을 아직도 재미와 빠르기와 성장과 지식의 마당으로만 가려는 내 발걸음이 야속하다.
나라에서는 온라인으로 비대면 예배를 하라는데 용어조차 생소하고 그런 형식에 익숙하지 못하니 이 무식함을 어쩌나. 전염병에는 과한 것이 낫다고 몰아붙이니 나는 부적응증세가 나타난다. 무식이 죄라지만 왜 이런 일 때문에 신앙과 양심에 따라 예배를 드리며 불안과 죄의식을 느껴야 하나? 정서적으로 숨쉬기 어려워지고 목을 옥죄어드는 것 같은 가위눌림이 온다.
코로나는 내게 변하라는 것인가 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경고 같기는 한데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알지 못한다. 이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리로 오라” 하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 “그 쪽은 아니라”는 핀잔만 듣는 꼴이다. 내가 무식해 예언서에서 길을 잃는다 했더니 세상에서도 또한 갈 길을 찾지 못한다.
“무식하다, 무식하다, 그래 나는 무식하다”를 외치며 이 이상한 2020년에 겨우 더듬어 가던 길마저 잃었다. 자녀의 세대를 지나 자녀의 자녀가 자라고 있으니 시대에 몇 걸음 떨어져 앞사람 뒤만 보며 쉬엄쉬엄 가야겠다. 하늘보고 땅보고 길가의 꽃향기 맡으며 이젠 슬며시 옆길로 접어들고 싶은 마음도 슬금슬금 솟아난다. 이 무식함과 황당함을 어이할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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