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통한 깨달음(다윗)
이 나이가 되니 알 것 같다. 인생을 사는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때로는 정확한 판단이, 판단과 행동의 유보가, 다른 이의 행동에 대한 빠른 대처가 각각 필요한 때가 따로 있었다. 어릴 때에는 강하고 빠른 것만이 최고인줄 알았고 젊을 때에는 승리만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이길 수 있어도 때로 져주는 것이 즐겁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느리고 약한 것도 그리고 지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아무런 행동이 없어도 일이 없어도 편안함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내 양들을 해치러 맹수들이 어슬렁거릴 때, 내 앞에 사울왕이 누워 있었을 때, 이스라엘을 향한 골리앗의 도발을 들을 때 정확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우선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상대를 알아야 한다. 상대의 현 상태와 장, 단점을 정확히 분석하면 내 판단의 반은 끝이 난 것이다. 그러나 같은 분석을 가지고도 정반대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상식선에서 안전한 선택을 할 것인가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역발상적인 선택을 할 것인가는 온전히 스스로 취하고 책임져야할 부분이다.
골리앗의 함성을 들었을 때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히도록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사십여 일의 독주로 긴장이 풀려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창과 칼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무기 중에 승산이 있는 것은 물매 혹은 돌팔매였다. 어느 것으로 해도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그가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는 길어야 오 미터, 그러나 나는 짧으면 십여 미터부터 길면 백여 미터까지 자유로웠다. 한 번 안 되면 몇 번이라도 다시 공격할 수 있고 그동안의 경험으로 자신이 있었다. 나는 급할 것이 없었다. 정식과정을 거쳐서 그에게 도전했고 예상대로 승리했다. 내 도전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했다. 사고의 유연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칼과 칼, 창과 창의 싸움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물매는 짐승을 쫓는 것이지 대인(對人)무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짐승을 쓰러뜨릴 수 있었고 사람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쓰러뜨리면 좇아가 죽일 수 있다. 내 예상대로 나는 승리했다. 나는 실패해도 적어도 한 번 더 물매든 돌팔매든 가능한 거리에서 첫 공격을 했다. 아무리 중무장을 했어도 어디든 맞으면 적어도 이삼 분은 큰 충격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그 시간이면 내게는 충분했다. 사실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 나는 판단력으로 승리한 것이었다.
살다보면 감정이 이성(理性)을 압도해서 판단을 유보(留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런 순간은 지나친 감정으로 이성이 맹점(盲點)에 빠진 것이다. 이성적 판단력이 돌아올 때까지 감정이 가라앉을 때 까지 판단이나 행동을 하지 말아야한다. 내 삶에 있어서 압살롬을 대할 때 그리고 특별히 밧세바를 대할 때가 그런 경우였다. 나는 두 가지 경우에 모두 실패했다. 밧세바를 보았을 때 빠르게 고개를 돌리든지 눈을 감든지 아니면 적어도 어떤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했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아보라 한 것도 데려오라 한 것도 잠자리를 함께 한 것도 그녀의 남편을 불러 올린 것도 죽이도록 명령한 것도 모두가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것들 이었다. 이성이 압도당하고 맹점에 빠진 채 내린 판단은 하나같이 잘못 된 것들이었다.
압살롬에 관한 판단도 언제나 같았다. 나는 그 아이가 무조건 좋았다. 그 아이가 암논을 청할 때 허락하고, 삼 년이 지나 그를 데려오겠다는 요압의 요청을 허락하고, 헤브론으로의 외출을 허락하고, 진압군에게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그 모든 것이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상황에서 결정한 것들이었다. 내가 그들을 만나면 맹점에 빠지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그대로 현실이었다.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를 요하는 것들이었다. 그들과의 문제는 적어도 제기된 후 하루는 지나서 결정해야 했다.
적절한 대처를 빠르게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상대가 한 일에 대해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그때그때 알려 주어서 금지나 지속의 판단기준을 주는 것이다. 잘못된 것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을 빠르게 대처하지 않음으로 지속하게 한다거나 묵인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할 수도 있다. 내 삶에 있어서 암논이 다말을 겁탈했을 때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아서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는 사건이 생겼고 또 그에 대한 빠르고 분명한 대처 없이 넘긴 것이 점점 더 큰 사건을 초래하게 되었다. 내 평생에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 압살롬과 아도니야의 반역과 그 처리과정에서의 그들의 죽음이었다. 적절한 대처를 빠르게 못한 이유는 가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이고 그것은 내가 삶의 우선순위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가정을 통한 신앙교육이 가장 우선인데 그것이 국내외 정치라는 허세와 미명(美名)에 밀려나 참담한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실수는 애쓰지 않아도 만들어지지만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꼭 같은 삶을 한 번 더 산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지만 그럴 수 없으니 글로라도 남겨서 다른 이들이 내 삶을 거울삼아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를 바란다. 삶에는 정확한 판단이 반드시 필요한 때가 있고 경우에 따라 판단을 유보해야만 할 때도 있으며 빠르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가정을 통한 바른 신앙의 전수라는 분명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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