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다윗

내 삶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다윗)

변두리1 2014. 7. 1. 14:18

내 삶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다윗)

 

  최근 들어 몸과 마음이 많이 약해 졌다. 꿈에 자주 고향과 부모님이 보인다. 무슨 말씀을 하실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으신다. 칭찬을 하시려는지, 책망을 하시려는지. 내 삶의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많은 장면들을 보시고 나를 탓하고 싶으신가 보다. 돌아보면 한스러운 순간들. 내 생애에 그 장면만 없었더라면 하는 되돌아가 다시 하고픈 내 인생의 커다란 실수들을 되짚어 보고 싶다. 노인들은 과거에 산다. 잘했던 것 보다는 못했던 일에 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지우고 싶은 첫 장면은 어느 따듯했던 봄날 지붕에서 물끄러미 밧세바를 바라보던 그 장면이다. 처음에는 잠이 덜 깨 몽롱한 의식 속에 목욕하는 그녀를 보았다. 나는 그녀를 보고 있어도 그녀는 전혀 나를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비서를 찾았다. 나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내라고 했다. 그 어떤 힘이 나에게 마술을 건 것 같았다. 판단력과 합리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성과 양심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 지점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맹점(盲點)이었다. 나는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맹점에 갇혔다는 것을. 맹점에 빠지면 정상이 될 때까지 눈감고 판단도 하지 말고 행동도 멈추어야 했다. 나는 정상인줄 알았고 평소보다 더 많은 결정과 행동과 명령을 했다. 그 모든 것들은 내 삶의 거대한 실수들이었고 결코 돌이킬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이 정상화되었을 때 회한과 자책만이 가득했다. 그것들이 하나님이 없다면 내 본연의 모습들일 것이었다. 한없이 죄스럽고 서글펐다.

  지우고 싶은 내 삶의 두 번째 장면은 그술의 외가에서 돌아온 지 두 해가 흐르고 왕궁에서 압살롬을 다섯 해 만에 만나 서로 목을 끌어안고 통곡하던 장면이다. 나는 그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그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애비로서의 미안함도 많이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여 놓고 서로 만나지 않는 어정쩡함도 있었고 뭔가 깔끔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나 자신의 안일함에 해야 할 너무도 중요한 일이 산더미 같다는 핑계도 있었다. 그래도 내 아들을 나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조금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들을 그 당시는 그가 악의 없이 객기(客氣)를 부리고 있다고만 짐작했다. 조금 더 지나면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일을 저질렀고 애비나 자식이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마음속에 끔찍한 흉계(凶計)를 품고도 애비를 껴안는 자식이나 자식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통곡하는 애비나 한심하기는 매 한가지다. 그 사건의 결과로 그 녀석은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그 실수도 부족하여 그 자식을 살리라고 그 놈을 잡으러 나서는 장병들에게 명령했으니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전쟁을 했을까. 내 머리와 가슴이 그날 따로 놀았다. 머리의 명령을 가슴이 따르지 않고 장수는 내 가슴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날 압살롬과의 목을 껴안고 통곡하는 장면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해를 했던가. 말하지 않아도 다 전달되고 말하지 않아도 다 들을 수 있다던 내 지론은 너무도 큰 오해였다. 그때라도 껴안고 우는 대신 확실히 말해 주었어야 했다. 신앙을 가져라. 이스라엘의 훌륭한 왕이 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흔들림 없는 신앙이라고.

  마지막으로 지우고 싶은 내 생애의 장면은 솔로몬에게 요압을 죽이라고 유언하는 장면이다. 요압이 내 삶에 불편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늘 말하듯 그가 잘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도 할 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객관적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잘못한 부분보다는 공을 세운 것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내 휘하에 그만큼 믿을만 하고 유능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요압만큼 충성스럽고 정직하고 사심이 없는 이가 있기나 한가. 나를 위해 온전히 한평생을 산 사람을 그것도 얼마나 자신이 없었으면 신출내기 왕에게 죽이라고 떠넘기는가. 죽일 일이 있으면 직접 처단하든가 아니면 최소한의 체면(體面)이나 위엄(威嚴)만이라도 지켜 주었어야 했다. 내 자신은 너그럽고 직접 복수하지 않는다는 선한 평판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었다. 원수도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받고 싶었다. 그러니 사울도 원수가 아니었다. 시므이도 원수일 수 없고 압살롬도 죽으면 안 되고 요압도 처리할 수 없었다. 거짓 평판 사실이 아닌 평가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었나. 요압과 시므이를 반드시 죽이라고 죽으면서까지 유언을 하고 기브온 족속이 사울의 후손을 목 베겠다고 요청했을 때 내 아내가 될 뻔 했던 메랍의 다섯 아들들을 내어 주었다. 앞뒤가 맞지 않고 겉과 속이 다른 나를 본다. 민망하고 부끄럽다.

 

  내 삶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이 왜 이것들 밖에 없겠는가. 그런 장면들을 다 지우면 내 삶은 반도 남지 않을 것이다. 민망하다고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혹여 조금이라도 괜찮은 부분이 있으면 또 그대로, 남기고 기록해서, 내야 한 번 살고 하나님께 가지만 오고 오는 세대를 살아갈 이들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라도 삼아 실수를 줄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