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언덕의 거수(巨樹)들
오후 네 시의 햇볕은 나른하다. 서예가의 거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대학교 담을 따라 정문 쪽으로 걷고 있다. 오월도 하순, 가늠키 어려운 날씨다. 반팔에 얇은 점퍼를 걸쳤어도 쌀쌀함이 밀려온다. 며칠 찌푸린 하늘이더니 오늘은 흰 구름만 몇 점 높이 걸린 채 푸르다. 대학과 도로의 경계를 만들며 약하게 진 비탈위에 선 나무들이 울울창창하다.
거대한 나무와 그 무성한 잎들이 뿜는 기운이 도로를 넘어 내게로 온다. 흔들리는 바람 따라 반짝이는 잎들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찌른다. 올림푸스 산을 오르는 언덕이 있다면 저런 나무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양 옆으로 도열해 있을 것 같다. 날마다 맹렬한 속도로 몸피를 불리고 한층 짙게 푸르러가는 나뭇잎들이 빠르게 넘어가는 도미노 조각들 같다.
두어 달 전만해도 앙상한 가지에 새 잎이 어색하게 돋아나더니 사월을 넘기며 속도를 붙여갔다. 하루만 자고 나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잎들이 연두를 지나 녹색을 거쳐 점점 짙어져 간다. 살아온 날들에서 풀과 나무들이 이처럼 분명하게 엄청난 속도로 산하를 푸르게 물들인 적이 있었나 싶다. 아마 지난해나 또 그전 수년도 큰 차이 없는 속도였을 게다. 별다른 감격 없이 바라보던 산하의 변화가 늘어가는 내 나이와 함께 더 절실하고 민감하게 다가왔을 게다.
자연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게 삶의 문화다. 옛글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곳 없다고 했지만 이곳을 삼사십 년 떠나 있다 찾아온 이들은 그런 말을 전혀 할 수 없으리라. 내 살던 곳이 금천동인데 이제는 십대를 보낸 그곳의 그 시절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산과 언덕이, 개울과 논밭이 알아볼 수 없이 상전벽해가 되어 있다. 마을의 개천은 복개되어 도로로 바뀌었고 산과 언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땅에 고층아파트가 줄지어 있다. 도시가 확장되자 문명의 물살이 점차 변두리로 밀려가고 있다.
문명의 발전으로 요즘은 작별과 기다림 없는 시대란다. 예전에는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과 채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언제나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비닐하우스와 냉장고가 있어 일 년 내내 딸기, 수박과 작별하지 않을뿐더러 바나나와 키위도 접할 수 있다. 내 어렸을 적만 해도 집에서 어머니가 만든 국수를 먹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밀가루를 반죽해 치대고, 깔판과 홍두깨를 꺼내어 벌이는 몇 시간의 일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물을 끓여 삶은 국수가 상에 오르기까지 기다림과 함께 그것이 눈앞에 나타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삶의 터전이 급격히 변모하고 있다. 우리의 주변 환경이 나날이 사라지고 있는 게다. 내 사는 청주의 중심부에도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서쪽의 넓은 땅에 산업단지가 건설 중이다. 이미 오송과 오창이 고층건물들로 상업과 주택지구의 모습을 갖추었고 청주의 사방으로 대단위 고층 아파트와 도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의 푸른 지역들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느낌이다. 수백 년 균형을 잡아왔을 이 땅의 한 부분들이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푸른 피부를 잃고 붉은 속을 드러내는 것이 내 잘못인양 아프고 민망하다.
며칠 전 괴산을 지나 미원을 거쳐 집으로 돌아올 때 바라본 산속과 길가의 나무들이 마치 화폭에 번지는 푸른색 물감처럼 산하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인간은 푸른색의 자연을 보면서 순해지고 착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푸른 풀과 나무는 우리를 향한 신의 최고 선물일 게다. 오월은 산하가 되살아나는 시절이다.
거대한 나무 사이로 그리스 로마신화 속 제우스와 아프로디테라도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늦은 오후, 따가운 햇살에 은빛비늘처럼 빛나는 나뭇잎과 푸른 하늘을 보며, 감탄어린 눈길로 또 다른 인상파화가들의 후예가 나타날 것 같다. 나무들은 자신의 학문에 일가를 이룬 오십대 후반의 학자 같기도 하고 무한한 하늘공간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이 시대의 사회적 책무를 아는 기업가 같기도 하다.
때 아닌 오월의 쌀쌀함에서 본연의 날씨로 돌아섰는지 나는 겉옷을 견디지 못 하고 반팔을 드러낸다. 햇살에 눈이 부셔 반쯤 감은 눈에 올림푸스 산에서 뛰놀던 철없는 에로스가 보이는 듯하다. 그라면 등에 맨 화살 통에서 금빛 화살들을 꺼내 길거리를 지나는 숱한 젊은이들을 향해 천진스레 쏘아대지 않을까. 화살을 맞은 젊은이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갑자기 달라진 심장의 쿵쿵거림에 의아해하며 달콤한 기대에 부풀어 오를 게다.
언덕 위 거수(巨樹)들은 여전히 헌걸차고 햇살은 뜨거워져 사람들을 나무 아래로 불러 모을 게다. 타는 가슴들은 자신들을 빼닮은 그 옛날의 멋들어진 신들의 이야기로 그들의 세계를 한 번 더 달구리라.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숱한 고초를 겪은 후 이타카로 돌아간다. 구혼을 핑계 삼아 행패부리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페넬로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늠름한 노장 같은 거대한 나무들이여, 이 거리에, 이 도시에 빛을 뿌려라, 무수한 잎들로 반짝이는 오월 햇살을 되비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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